비핵화①
- 이희재 [감옥 밖의 감옥]
- 2018년 7월 2일
- 4분 분량
칼럼 '감옥 밖의 감옥'은 <번역전쟁>을 펴내 독자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보였던 이희재 작가가 부정기적으로 글을 게재하는 코너입니다.
1927년 2월 중국 지린에 온 안창호는 조선 민족 운동의 장래를 주제로 강연했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재중 조선인들은 독립 운동 원로의 해박한 지식과 능란한 언변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안창호가 부르짖은 것은 실력양성론이었다. 조선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개개인의 인격과 수양이 낮은 데 원인이 있으므로 모두가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각자의 인격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안창호는 주장했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정신적 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이므로 미국인이나 영국인만큼 때벗이를 해야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부분의 청중은 연사의 주장에 공감했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의 강연 바탕에 깔린 애국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연장에는 지린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살의 김일성도 있었다. 소년 김일성은 실력양성론의 바탕에 깔린 무저항주의가 달갑지 않았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김형직은 밥상머리에서 어린 김일성에게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개량주의 노선으로 돌아선 독립운동가들을 자주 비판했었다. 소년 김일성은 종이 쪽지에 세 가지 질문을 써서 사회자에게 전했다. 첫째,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한다고 했는데 조선을 완전히 틀어쥔 일본이 과연 그것을 허용하겠는가? 둘째, 조선인이 정신 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셋째, 연사가 우러러보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열강이 과연 조선의 독립을 원조하리라고 보는가? 김일성은 조선의 인습이나 풍속에 미흡한 점이 있다고 보았지만 조선인이 열등하다고 개탄하는 안창호와 이광수의 논조는 조선 민족이 열등하기에 일본이 보호, 지도, 통제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논리를 정당화했으므로 민족의 저항심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생각했다. 도도한 기상으로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은 사회자가 질문지를 건넨 뒤 김이 빠져버렸다. 안창호는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짓고 연탁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조선 독립 운동의 세 갈래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이었다. 영어에 능했던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기독교 문화와 민주주의 제도가 발달한 강대국 미국의 도움으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창호뿐 아니라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등 대다수 개화파가 부르짖었던 실력양성론은 조선이 나라를 잃은 것은 조선 민족이 몽매한 탓이었으니 나라를 되찾기 전에 먼저 조선인 각자가 각성한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의 공통점은 문명된 ‘국제 사회’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주먹의 힘을 키우지 않아도 말만 잘 하고 교양 있게 처신하면 문명인으로 동등하게 대접해주는 ‘국제 사회’가 있으리란 기대였다. 윌슨 대통령이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에 조선의 외교독립론자와 실력양성론자가 열광한 것은 그래서였다. ‘몽매하고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수치스러워하던 조선의 문명개화론자들은 그래서 3.1운동이라는 비폭력저항을 일으켜 ‘국제 사회’에 호소해보았지만 총칼로 무장한 일본의 무차별 조선인 학살 앞에서 ‘국제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당시 일본은 1차대전의 전승국이었다. 일본은 1902년 맺은 영일동맹에 따라 영국의 요청을 받고 1차대전 때 지중해로 구축함 14척을 보내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영국 해군 수송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나라였다. 독일 잠수함 공격을 받고 침몰한 영국 수송선 승선원 3300명을 구출하여 27명의 일본 해군이 영국 국왕에게 훈장도 받았다. 1차대전 때 유럽 전선에서까지 상당한 역할을 맡았던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일본의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이 독립시켜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조선의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 도중 러시아에 들어선 소련 공산주의 체제 안의 수많은 소수민족, 패전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안의 소수민족을 들쑤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세 제국을 완전히 해체하려는 미사여구였지 전승국들의 식민지에는 적용될 리 없는 원칙임을 국제 정세에 어두운 조선의 선각자들은 몰랐다. 일본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비백인 국가로는 유일하게 1차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지만 국제 사회는 어느 정도 주먹의 힘을 보여준 아시아 신흥국에게 진입이 차단되어 있었다. 일본은 새로 창설될 국제연맹 헌장에 인종과 무관한 국가와 민족의 평등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거절했다.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도, 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컸던 서부와 흑인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던 남부의 정치적 입김을 의식했던 윌슨도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식민지였던 조선이 같은 전승국 일본조차 괄시할 만큼 인종적이었고 식민지 고수에 집착했던 영국과 미국 주도의 ‘국제 사회’에서 주먹에 기대지 않고도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만큼 조선의 지도자들은 좋게 말해서 어리숙했고 나쁘게 말해서 어리석었다. 조선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은 김일성의 무장항쟁 덕은 아니었다. 조선의 해방은 일본의 패전 덕이었다. 일본을 누른 것은 가깝게는 미국의 무력이었지만 멀게는 미국이 일본과의 태평양 전선에 주력할 수 있도록 소련이 유럽에서 독일군 정예 주력을 거의 혼자서 막아낸 덕이었다. 작전 중 사망한 474만 명의 독일군 중에서 355만 명이 소련군과 싸우다 죽었다. 4명 중 3명 꼴이다. 영국과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대전 때와 비슷했다. 1차대전 때도 2차대전 때도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과 같은 편에 섰지만 미국과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의 공멸을 원했다. 1차대전 때는 영미의 의도대로 독일 제국이 궤멸했고 같은 연합국이었던 러시아 제국도 영미가 후원한 공산주의 혁명 집단의 후방 교란으로 독일의 궤멸에 한발 앞서 무너졌다. 2차대전 때는 독일이 먼저 무너졌다. 그러나 소련은 궤멸하지 않았다. 자국민 6명 중 1명꼴로 2500만 명이 넘게 죽어나갔으면서도 소련은 유럽에서 거의 자력으로 독일을 무너뜨렸고 아직 원자탄을 개발하기 전이라 일본과의 싸움에서 고전하던 미국이 진작에 요청했던 대로 유럽에서 독일을 무너뜨린 뒤 전열을 가다듬고 시베리아, 만주로 진격하여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켰다. 소련군의 일본 진주는 시간 문제였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터뜨린 것은 대일본전 전승국의 지위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천황의 안위만 보장해주면 항복하겠다는 일본의 요청을 미국이 극력 거부한 것은 원자탄 투하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항복 뒤 미국은 천황을 전범에서 가볍게 빼주었다. 미국이 바란 것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원자탄을 투하할 명분이었다. 2차대전 중 소련은 유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제2전선을 열어달라고 사정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시간을 질질 끌다가 막판에 소련군이 전세를 뒤집고 독일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그제서야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밥숟가락을 얹었다. 전쟁 막판에는 독일과 손잡고 총부리를 소련에게 겨누는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1945년의 조선은 타력으로 해방된 나라지 자력으로 독립한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 해방의 은인은 일본을 패배로 몰아넣은 2차대전의 전승국들이었지만 2차대전의 전승 주역은 미군이 아니라 소련군이었다. 소련군은 38선 북부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철수했다. 소련군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었다. 미군은 38선 남부에서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중용했다. 일본에 빌붙었던 조선인들은 미군의 비호 아래 이미 6.25전쟁 한참 전부터 38선 남부에서 제주도를 중심으로 동족을 대거 학살했다. 미국이 원자탄을 안 터뜨리고 소련이 순조롭게 일본에 진주했다면 냉전의 분단선은 일본에게 짓밟힌 조선의 38선이 아니라 조선을 짓밟은 일본의 35선에 그어졌을 것이다. 미군은 지금도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전시작전권이 없어 군사 훈련 기간 중에는 바다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나도 구조 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중 광주 시민은 미군이 민주 시민을 도우려고 온다는 소문에 한때 들떴지만 미군 사령군의 재가가 없었으면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 체결을 번번이 거부하고 남과 북의 항구적 갈등을 갈망해온 나라의 군대가 해방군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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