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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는 책 한쪽 | 운명, 책을 탐하다



장서가


2014년 초 문예지에 처음으로 글을 한 편 게재한 일이 있었다. 그 잡지의 발행인이 나를 지면에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물어왔다. 그간 모은 책으로 『윤길수책』(2011) 장서목록집을 출간하다 보니 최근에 나를 서지학자로 불러주는 분들이 생겼다. 그래서 내 호칭을 놓고 서지학자, 서지가, 서지연구가, 장서가 중에서 고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잡지의 발행인은 ‘서지가’가 좋겠다고 하고, 어떤 분은 ‘서지학자’가 더 어울린다고 했다. 결국은 발행인의 의견에 따라 ‘서지가’로 정해졌지만 정작 나는 서지학이라는 학문을 배운 적이 없고 또한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탐서를 즐기는 문학애호가로서 ‘장서가’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장서가로 인정받기는 1992년의 일이다. 대한출판문화 협회는 매년 전국에 있는 장서가를 선발하여 ‘모범장서가상’을 시상하여 왔는데 내가 하동호 교수의 추천을 받아 92년에 모범장서가로 선정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책을 모으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기에 내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수집가와 장서가는 어떻게 다를까. 제일 큰 차이점은 수집의 순수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수집가 중에는 상당수가 수익을 목적으로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서점주인도 수집가일 수 있고 속칭 ‘나까마’라는 중간상인도 수집가다. 고물상도 수집가고 리어카 꾼도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을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장서가는 어떠한가. 장서가의 사전적 정의는 책을 깊숙이 간직해두는 사람을 말한다. 책을 사서 간직하지 않고 되판다면 그를 장서가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책을 모으면서 이것을 지켜온 사람이다.


장서 목록집을 출간하고 나서 가끔 사람들로부터 그 책들을 다 읽어봤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으로 싱거운 질문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서슴없이 읽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장서가는 책을 읽기 위해서만 모으지는 않는다. 물론 구입한 책을 읽어도 좋고 그냥 꽂아 놔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2만 권에 가까운 장서를 모르고 산책은 거의 없다. 장서가는 어떤 책이든 그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서가 중에 애서가가 아닌 사람은 없다. 끼니 걱정보다 책 살 걱정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장서가다. 장서가가 가장 행복할 때는 애타게 찾던 책을 손에 넣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장서가로서 부끄러운 일은 책의 판본을 모르는 것이고 책을 훼손하거나 방치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 양장본의 역사가 100년 남짓한 시기에 전화로 소실되고 도난당하고 유실된 책들이 부지기수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중요한 문학 유물들이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책은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인류의 기록문화 유산이다. 장서가들은 이런 책들을 찾아서 보존하고 목록을 만들어 기록으로 남겨놓기도 한다. 참고로 근래의 대표적인 장서가들로는 안춘근, 하동호, 백순재, 김근수 제씨가 있다. 안춘근 씨는 출판학과 서지학 분야에서, 하동호 씨는 한국근대문학의 서지에서, 백순재 씨는 잡지에서, 김근수 씨는 한국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분들로 우리나라 서지 분야에 초석을 놓고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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