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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는 책 한쪽┃<대중의 시대 보통의 건축> 서윤영 지음


대중의 시대를 열어젖힌 건축들


“우리 집안은 김씨 파로서 몇 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숙종 임금 때 병조판서를 지내셨고, 또 몇 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정조 임금 때 사간원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증조부의 누님이신, 그러니까 제게는 대왕고모님이 되는 분께서는 박씨가로 시집을 가셨는데 그 시누이 되는 분이 고종 황제의 아드님이신 군에게 출가하셨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자기 소개를 할 때 흔히 이런 식으로 했겠지만, 요즘은 입시나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회사원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나 평범하고 화목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라며 평범함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에서부터 구 의회, 지방 시 의회의 출마자까지 모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얼마나 평범하고 서민적인 가정에서 자라왔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아울러 당선 후에도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며 길거리 노점에서 붕어빵과 어묵을 사먹는 등 끊임없이 평범하고도 서민적인 행보를 강조한다. 실제로 그들이 전통시장과 길거리 노점을 평소에도 이용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이러한 모습을 연출하는 이유는 현대가 평범함을 강조하는 대중의 시대라는 방증이다.


나는 평범한 대중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이 조선시대에 족보가 있는 양반가문이었음을, 중세시대에 작위가 있는 귀족이었음을 말하지 않으며, 또한 부르주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통령부터 서민층까지 전국민이 오로지 나는 평범한 대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 취향도 대중적으로 바뀌었다. 30~40년 전만 해도 양갓집 규수는 맞선 자리에 나가 “취미가 무엇이냐”는 남성의 물음에 음악감상이라고 답하면서 즐겨 듣는 곡은 베토벤 교향곡 몇 번 몇 악장, 바이올린 협주곡 몇 번 몇 악장이라는 레퍼토리를 읊어대곤 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오디오와 음향장비가 훨씬 좋아진 요즘은 대통령의 손자손녀도 K-pop에 열광한다. 한국의 팝송이라는 뜻의 K-pop, 여기서 팝송(pop-song)은 파퓰러 송(popular song) 즉 대중가요라는 말이다. 바로 이 파퓰러, 대중은 20세기 미국에서 탄생했다. 귀족이 아니고 젠트리, 부르주아도 아닌 노동자, 직장인, 자영업자 등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중이다. 200~300년 전이었다면 분명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 대다수 이들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생기면서 도시로 들어와 근로자와 직장인이 되었다.


국민의 90%가 농민이던 사회를 이제 전체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10%가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시대로 만든 것은 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이었다. 이는 주전자의 물이 끓는 과정을 지켜본 어느 한 사람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인 일이자 약 2~3가지의 동인이 복합된 필연적 사건이었다.


첫째로 17세기가 되면 영국의 농업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간단한 수준의 기계가 도입되어 경영방식이 변화하고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이 시작된다. 또한 식량이 아닌 상업용 작물을 키우는 상업농업도 등장했다. 이 현상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본래 농민들이 농사를 짓던 땅에 농민을 몰아내고 양모를 얻기 위한 양을 키우게 된 것이다.


둘째로 식민지인 인도에서 값싸고 질 좋은 목면이 대량생산되면서 양모와 목면이 쌓여갔다. 셋째로 기계의 도입과 인클로저 운동으로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력도 풍부해졌다. 산업혁명은 이러한 요인들이 맞아 떨어져 발생한 일이었다. 혁명 초기의 기계들이 주로 실을 잣는 방적기, 베를 짜는 방직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농민이 올라와 도시의 직공이 되면서 노동자 대중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발생했고, 이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새로운 핵심소비계층으로 등장한다. 농업과 비교해 직공은 시간제 고용과 월급(혹은 주급) 단위의 급여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든, 주말에 경기장에 가서 야구경기를 보든, 여름휴가에 맞추어 해외여행을 가든, 문화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출퇴근 시간이 불분명한 농민과 달리 노동자는 시간이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명시된 고용노동의 특성상 모든 노동자의 일상은 근무 시간과 근무 외 시간으로 정확히 나뉘며, 근무 외 시간인 여가 시간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일주일 혹은 월 단위로 지급되는 급여로 인해 매일 조금씩 쓸 수 있는 돈도 생겼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매일 조금씩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을 모두 가진 노동자는 ‘도심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과거 젠트리나 부르주아가 향유하던 문화를 새롭게 누리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귀족과 중산층 문화는 변형을 거쳐 대중문화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해 프랑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는 뮤지컬과 영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변형되었고, 영국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그랜드 투어는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직장인의 해외여행과 단체관광여행으로 대중화되었다.


이 평범한 일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 산업혁명인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회배경과 그 변화의 주역이었던 부르주아와 젠트리에 대해 살펴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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