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선 파울 운슐트의 저작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데,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셨나요?
A∥ 운슐트 박사는 다양한 학문 이력을 바탕으로 현재 독일 샤리테 의대 부속 연구소에서 중국의학 관련 연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고전으로 회자되는 황제내경이나 난경 등을 번역하였고 현재도 다양한 중국 문헌 연구와 서양언어로의 번역 편찬사업을 활발히 진행중입니다. 서양의학사와 중국의학사를 관통하는 시각을 갖고 있으며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의 통합과 절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전통의학이라고 하면 동양권을 연상하기 쉬운데, 서양의 전통의학 역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운슐트 박사는 의학에 관련된 ‘역사 시리즈’를 일찍이 발간하였는데 의학이론사와 본초학사를 내실있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운슐트 박사는 본래 약학을 전공하였고 중국에서 다시 본초학을 공부했습니다. 『History of Ideas』는 과거, 의사학에 관심을 두었던 많은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책이고, 서양의 한의과대학에서는 교과서로도 활용되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2년 전 잠깐 독일을 방문하여 운슐트 박사를 만나 『History of Ideas』의 번역에 관심을 표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본인이 쓴 대중서라며 이 원고를 소개받았습니다. 본인의 저술이 한국에서 처음 번역되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을 먼저 소개했으면 하는 뜻을 표하면서 영어 번역본이 곧 출간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중역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운슐트 박사가 독일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분이고, 영어번역본이 자신의 뜻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며 번역을 권유했습니다.
Q∥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의 제목이 『의학이란 무엇인가-동서양 치유의 역사』인데, ‘치유’와 ‘의학’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A∥ 행위로만 판단한다면 치유가 포괄적인 의미로서 의학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언급한 치유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통칭합니다. 의학은 여기에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논리를 부여한 체계화된 치유라 볼 수 있습니다. 운슐트는 치유를 의학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논리가 스며들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 과학의 발전 과정을 발견과 발명의 역사로 설명하지만, 운슐트는 이에 대하여 전혀 다른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Q∥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의학사상이 전개되어온 흥미진진한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두 의학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지요?
A∥ 느슨하게 설명하자면, 양자 모두 인간과 질병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고,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인간이냐, 질병이냐가 그 차이점이라 하겠습니다. 호리지차가 천양지차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의 관점에서 다시 설명하자면, 두 의학 모두 자연철학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공통점이고, 그러한 자연철학을 발생시킨 사회정치적 토양이 전혀 달랐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사회정치적 토양이 과연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문제와, 개별 의학사상의 흐름이 전개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회정치적 특징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Q∥ 저자가 동서양 의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신선하다고 하셨는데, 주로 어떤 점을 두고 하는 말인지요?
A∥ 동서양의학의 특징이나 그 차이를 규명하려는 노력은 동서를 불문하고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몸에 대한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해서도 이미 철학적으로 충분히 깊이 있게 규명된 문제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철학적 흐름에 따르면 그 결론은 몸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동양의 우위를 인정하고 서양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것이 큰 흐름입니다. 물론 동양의학의 우수성과 서양의학의 한계점들이 최근 들어 보다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책의 신선함이라고 한다면 균형 있는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시각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발점은 같을 수 있지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충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동서양 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의학이 이러한 모습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과정을 자신의 시각에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학계에서도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을 토대로 한 미래의 설계인데, 이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Q∥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삶의 밀접한 토대로 함께 자리잡은 한국의 독특한 의료지형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면요. 그 속에서 이 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 바로 앞의 답변과도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이어서 말씀드리자면, 저자는 현재 서구에서의 서양의학의 현주소를 ‘세계화’라는 단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긍정적 의미도 내포하지만 극대화된 자본주의 이미지 또한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서양과학에 기반한 서양의학의 주도 하에 선별적으로 전통을 받아들이려는 서구 세계의 흐름을 반영합니다. 전통의학의 토대가 미약한 유럽의 경우와, 한의학과 양의학이 대등한 제도로 자리잡은 한국의 상황과는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가게 될 동서의학의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서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단순히 주어진 조건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걸맞는 가치를 찾아나가는 것도 우리의 할 일이라 여깁니다.
저자는 서양에서의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의 접점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왔습니다. 한국에서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운슐트 박사가 바라보는 해결점은 이 책에서 명확하게 표출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중국의 경우 중의사들은 서양의학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고 있고, 서양에서는 중의학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을 향한 길을 열어놓았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그치고 있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저자는 중국의 중의학 모델, 즉 중의사가 중의학과 서양의학을 동시에 시술하는 모델을 하나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를린 샤리테 의대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 함께 연구를 진행해온 중국의 정금생 교수를 지난 6월 인터뷰한 일이 있었는데 이 두 노 교수가 많은 부분에서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정금생 교수는 현 중국의 중의사 제도를 열렬히 지지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책은 한국의 의학지형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화두를 던져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Q∥ 그렇다면, 중국과 구별되는 한국 한의학의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같은 동아시아 의학 내에서도 한국의 한의학과 중국의 중의학은 그 바탕이 되는 이론과 의서는 공유하지만 역사 속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해당 지역인들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의료제도의 특성을 찾으라면 “민간의료 확대를 위한 끊임없는 추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반사회에서 기술직을 천시하면서도 지식인의 소양으로서 의학을 강조하였고, 실제적 의학지식을 목민관으로서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난히 구급의서나 향약의서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향촌의 노인들이라면 누구나 단방요법과 같은 한두 가지 긴요한 의학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침구술에 있어서도 다소 정체되었던 중국과 달리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했고 사암침법과 같은 독특한 침법을 개발하여 현재 멀리 유럽에서까지 효과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중의학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병증 위주의 서양식 사고방식 유입으로 증상과 처방의 기계적 대입으로 흘러가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인체를 중심에 놓고 증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하는 동의보감의 정신이 계승되면서 사상의학의 형성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현재 임상가에서는 동의보감과 사상의학의 방법론이 한의학 임상의 적지 않은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Q∥ 오늘날 한의학은 서양의학 뒤로 밀려난 것이 사실입니다. 한방과 양방의 바람직한 관계상을 어떻게 그리고 계신가요?
A∥ 일제강점기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뿌리 뽑기가 자행되면서 한의학 역시 존폐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의생’으로 격하되고 제도권에서 소외되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한의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제가 식민지배의 한 방편으로 심어놓은 서양의학은 미군정 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현재는 국민건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제도적으로는 서양의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해방 후 60년간 끊임없는 제도적 보완으로 보건소가 늘어나고 한방 의료의 보험혜택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국민들의 생활과 다시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두 의학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는 상황이 가장 바람직해 보입니다. 이러한 뜻은 양방의료인이나 한방의료인이나 모두 공유하지만 방법론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두 의학이 독립적인 자연과학 이론을 토대로 성장해온 만큼, 기계적 결합이나 한쪽으로의 일방적 흡수 통합을 주장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무리하게 하나로 만드는 일은 자칫 테크닉만 남겨둠으로써 그 이상의 발전을 저애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두 체계의 독자성을 균등하게 유지하면서 수혜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겠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Q∥ 한의사로 진료를 하고,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승정원일기의 임상의학 기록 연구」「조선시대 의녀의 정체성 연구」 등의 논문을 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주요 연구 관심사는 어떤 것인지 들려주세요.
A∥ 많은 분들이 한국 한의학의 정체성을 묻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의학은 동아시아인들이 함께 만들어온 의학입니다. 고유의 것만을 주장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우리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옳지 않습니다. 의사학 분야에서도 아직 식민지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한의학을 연구하는 의사학이라는 분과가 만들어진 것이 이제 10년째입니다. 현재까지 우리 의학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가 나왔지만 연구할 내용이 아직 무궁무진합니다. 승정원일기나 조선시대 의녀와 같은 주제도 한의계 쪽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2년 사이의 일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왕실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500여 종에 이르는 우리 의서들을 비롯해서 문집류에 등장하는 의학관련 내용에 이르기까지 탐구해야 할 분야가 풍부합니다.
한편으로 해외에서도 한국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상세한 진료기록에 대한 외국 연구자들의 관심이 크고,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의료인 양성 제도인 의녀제도 역시 의사학자들의 놀라움을 자아낸 바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한국 한의학의 세부 내용들을 발굴하는 한편, 중국이나 일본, 티벳, 인도 등과 구별되는 한국 한의학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Q∥ 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요?
A∥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둘 다 인류문명을 기반으로 발달해왔습니다. 이 두 의학의 경계 밖에서 바라보는 분들은 이 책을 통해 양자를 균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에 몸담고 계신 분들이라면 편견 없이 상대방을 공정히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이 책에서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체질의학으로 석사학위를, 의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통의학史연구소에서 전통의학문헌을 연구하면서 경희대학교 대학원 의사학교실에 출강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인 30-40대 여성의 사상체질별 안면특징에 관한 연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임상의학 기록 연구」, 「우잠잡저(愚岑雜著)에 관한 一考」, 「조선시대 의녀의 정체성 연구」, 「침구택일법(鍼灸擇日法)이 수록된 조선 의서와 승정원일기 사례 연구」 등이 있다.
베를린 샤리테 의대의 중국 생명과학 윤리, 이론, 역사 연구소 소장이다. 국제학술기구인 국제아시아전통의학학회(IASTAM,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Traditional Asian Medicine)에서 인류학자 찰스 레슬리와 더불어 모임을 이끌기도 했다. 『Medicine in China』 시리즈를 집필하여 이론의 역사, 본초학의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그의 저작은 서양의 한의과대학에서 기초교재로도 활용되고 있다. 또한 『황제내경』, 『난경』 등을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하였고, 『황제내경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유럽의학사와 중국의학사를 주제로 한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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