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나 계기를 들려주세요.
A∥국내 현대미술은 특히 70년대 이후 급변하며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되어왔습니다. 요컨대, 모더니즘의 끝자락과 포스트모던 미술로의 진입 및 체화가 본격화되면서 2010년에 이른 오늘, 우리의 미술은 이제 글로벌 시대에 역동적 세력으로 작용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양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또 무엇이 우리 미술에 한국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지를 자문하며, 우려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술을 뒤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본래 이 책은 2009년 봄,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ㆍ예술학과 대학원생들 28명과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시대적으로 정리하는 수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조를 짜서 19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특징적 양상을 10년 단위로 잘라 발표하고 토론을 하였지요. 각 시대별 화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대표’ 작가(예술가) 5-6명을 선정하여 각 조별로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7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작가들이니, 한국 현대미술의 원로와 중견 작가 22명을 2-3차례 찾아가 (녹취에 기초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수업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작업현장과 학교수업이, 작가와 비평이 병행되어 ‘살아 있는 미술사’를 느낀 셈이었지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생생한 육성을 기록하여 시대의 화두와 함께 책으로 만들자고 결심했지요. 1년 이상 나름대로 세심하게 준비한 끝에 이번에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Q ∥ 한국 현대미술의 작가들에 관한 기존의 책들과 비교하여 이 책의 특색이나 장점은 무엇인가요?
A∥기존의 책들은 크게 미술사논문집이나 비평모음집, 그리고 인터뷰 묶음집으로 나눠볼 수 있어요. 그런데 양자를 복합시킨 책은 찾기 힘들지요. 이 책은 미술사라는 기본 골격에 인터뷰를 가미한 방식이 특색입니다. 뼈대와 살을 균형 있게 만들어 한국 현대미술에 관한 전체적 그림을 보이고자 한 것이지요. 시대의 화두를 다룬 박사 및 박사과정생들의 논문이 책의 ‘뼈대’라면 석사들의 인터뷰는 ‘살’이지요.
기존에 출판된 논문집이나 비평집은 좀 딱딱하고 작업의 현장성을 전달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한편, 인터뷰의 경우, 최근에 주로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나온 것이 몇 권 있는데, 많은 작가를 캐주얼하게 다루다 보니, 작업내용과 더불어 신변잡기가 섞여 나오는지라 난삽한 감이 없지 않아요. 논문과 인터뷰의 복합을 시도한 이 책은 기획에 신경을 많이 쓴 책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도 작가의 개인사보다는 시대성과 연관하여 각 시대의 작업에 집중하고자 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Q ∥ 스물두 명의 작가를 인터뷰하셨는데, 인터뷰 형식에 매력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전공 학생들이 인터뷰를 할 때 어려운 점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었나요?
A∥학생들은 각자 맡은 작가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작업 자료를 준비해가서 가능하면 작가의 작품에 집중했습니다. 적어도 2-3번 작가를 만나러 가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한 분도 예외 없이 크게 환영해주셨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잔뜩 긴장하며 찾아간 학생들에게 작가분들은 도리어 ‘왜 진작 안 왔느냐’ 하고 반색하며 맞아주셨다고 합니다. 그때 느꼈던 안도감과 감동을 수업시간에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많이 긴장했던 탓인지 학생 대부분은 허기진 상태에서 갔다가, 거의 배불리 얻어먹고 돌아왔더군요. 분에 넘치는 ‘호강’도 맛보았던 것 같습니다. 자택에서 식사 대접을 받는가 하면, 인사동 단골음식점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을 대접받아 ‘맛있는’ 실속 인터뷰를 챙긴 팀도 있었습니다.
어떤 조는 퍼포먼스 현장에서 참여자 역할을 하며 작가를 만났는데, 심층 인터뷰 후 작업실을 나서 멀리 갈 때까지 먼발치에서 지켜봐주시던 모습이 아버지를 연상시켰다고 했습니다. 또 공장같이 큰 수장고와 작업실에서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한 후, 단골 감자탕 집에서 소주 한잔과 함께 학생들의 미래를 상담해주신 자상한 할아버지 같던 작가도 계셨지요.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작업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을 염려해 밖에까지 나와 기다린 작가와의 첫 만남, 직접 재배한 고구마와 밤 등 ‘무공해 웰빙’ 간식을 내주며 푸근한 어머니 같은 인상으로 기억된 작가도 있으셨고요. 또 작업실 오픈 파티에 초대받아 작가가 직접 잡은 생선회까지 얻어먹고 온 팀도 있었는데, 그 이후 이들은 작가의 퍼포먼스에 직접 참가,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Q ∥ 개인적인 질문이긴 한데요. 교수님은 학부 때 사회학을 전공하셨어요. 사회학을 공부하다 미술사학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A∥현대미술을 아주 모르는 입장에서는 사회학과 미술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관심을 갖고 조금이나마 공부한 분들은 그 연관을 쉽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70년대 이후에는 미술의 역사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볼 때, 특히 일찍이 영국에서 ‘미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라는 담론이 마련되어 미술과 사회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발전하죠.
제가 미국이나 다른 유럽이 아닌, 영국에서 공부한 것도, 되돌아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적합한 길을 갔던 것이기에 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성향에 좇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제일 맞는 길을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제게 사회학이란 학문은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와 이상형으로 삼았던 언니가 공교롭게도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본래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를 닮아 중학교 때부터 미대 입시를 준비했어요. 하지만 고3 올라가면서 공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눈물을 머금고 미술에 대한 미련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석사과정에 미술사라는 과목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이거다’ 싶어 바로 홍대에 지원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후 영국에서 공부한 대학이 미술사를 사회학과 심리학(정신분석학)적 시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명망을 가진 대학이라, 제 연구의 여정은 나름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믿고는 있습니다만, 심화시키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Q ∥ 일반 대중은 보통 역사 속 미술가를 만납니다. 세잔이나 반 고흐, 마네 같은 작가들 말이지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미술사 수업은 대개 팝아트를 배우면 종강을 했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선생님은 이 책에서 오늘날의 미술작가와 대중 사이의 '동시대적' 소통을 주선하셨습니다. 책을 덮은 독자들이 각자의 삶에서 '오늘날의' 미술작가를 만나는 방법이 있다면 몇 가지 일러주세요.
A∥아무래도 전시가 중요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들에는 오늘날 활동하고 또 영향을 미치는 작가들을 다루게 되는데, 직접 전시를 보아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가능하면 작가도 직접 만나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작가들이 어렵고 멀리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늘 관객을 기다립니다. 미술전공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작품에 동감하거나 단순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작가에게 귀한 존재이지요. 더 나아가 자신의 견해를 가진 관객이라면 더욱 반가워합니다.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전시의 오프닝 날입니다. 날짜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맞춰 가십시오. 미리 작품을 인터넷이나 자료를 통해 알고 가면, 더욱 의미 있는 만남, 작품과 작가 양자를 뜻있게 만나는 시간이 될 테니까요.
Q ∥머리말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세대간 대화를 강조했습니다. 한국미술계를 넘어, 이 시대에 ‘세대소통’이 중요한 까닭을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A∥ 대학에서 늘 젊은 학생들을 대하면서도 때로는 대화가 잘 안 될 때가 있다고 느낍니다. 동질적이고 관심도 유사한 집단에서 이 정도일진데, 대학 밖은 더할 수밖에 없지요. 다양한 세대와 이질적 관심의 일반 사회에선 그 괴리가 더욱 심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테크놀로지가 너무 발전해서 이를 추구하는 신세대와 그에 못 쫓아가는 옛세대 간의 갭은 이전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봅니다.
홍익대 미대라는 커다란 예술계 집단에 있다 보면, 정말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윗분들이 하나씩, 둘씩 은퇴하시고 때론 타계하시는데, 신세대 학생들은 우리 미술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또 무관심한 편입니다. 학생들의 무관심은 중간세대인 저희에게 그 책임이 큰데, 세대간 연결을 잘 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학교교육과 더불어, 책이 중요한 매개체라고 봅니다만... 정작 미술계에 이런 다리 역할을 해주는 책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습니다.
처음에 이 책을 구상하면서, 세대소통을 꾀하는 책은 어렵지 않는 방식으로 또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내용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세대간 소통을 모색하는 ‘지혜로운’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책은 우선 미술계에서라도 소통을 복구하고 대화를 서두르려는 작은 시도입니다. 대화를 하려면 알아야 하고, 알려면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요. 이 책을 통해 젊은이를 포함한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작가가 들려주는 ‘그 시대 그 얘기’가 진부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나와 상관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면, 저희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을 받은 거겠지요?
이렇듯 소통을 복구하는 움직임이 퍼져간다면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소통의 차단은 사회의 발전에 치명적 방해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빠르게 발전할 하이-테크놀로지로 말미암아 그 소통의 의미가 더욱 커질 것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Q ∥ 하나로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선생님은 1970-2000년대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화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의 국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A∥ 서구미술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생각한다면, 60년대 후반 및 70년대부터를 포괄적으로 포스트모던미술의 시기라 말하고, 구체적으로는 포스트미니멀이라 하지요. 서구 현대미술의 흐름으로 볼 때 1960년대까지 진행되었던 모더니즘미술이 70년대부터는 포스트모던으로 전향되면서 ‘시각중심’의 미술에서 공감각이나 몸의 체험이 중요한 미술로 이행된 것이 이제까지의 현대미술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미술의 경향은 점차 ‘나’와 ‘타자’ 간의 관계성이나 친밀성을 탐색하는 주제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하겠는데, 우리가 사는 글로벌 시대에 그러한 면이 특히 결여되어가는 것을 볼 때, 역시 미술은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한국의 미술계를 보자면, 70년대부터는 특히 서구와의 연관성을 제쳐놓고 독자적 양상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부터 우리 미술의 독자성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외부와 담을 쌓아둔 상태의 우리만의 미술이 아니라, 타문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무엇을 채택했는가의 시각에서 규정되는 우리의 미술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수용’과 ‘채택’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받아들였는가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미술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맥락의 고유성을 고려하면서도 우리 스스로가 서구를 중심한 세계 미술의 흐름에서 무엇을 채택하고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성향을 아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 책이 그러한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라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자부심을 갖고서 자신을 알아가려는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Q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A∥글쎄요. 너무 많기도 하고 또 막상 꼽으려니 생각보다 적기도 하네요. 본래, 미술사가는 자신의 개인적 선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신조(?)에 따라,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 최근에 관심이 많이 생긴 작가를 물으신다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심층 인터뷰를 가졌던 작가들, 예컨대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나 사진작가 다렌 아몬드(Darren Almond)가 떠오르네요. 좋아하는 성향으로 말씀드리자면, 가볍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심도 있는 스타일의 작가를 선호합니다. 국내 작가의 경우는 다음에 저 자신의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평론서로 정리해보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또 책 얘기로 돌아왔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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