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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는 책 한쪽 | 위로하는 애벌레


영원한 대지 속으로 들어가다 · 대왕박각시 애벌레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움

대왕박각시 애벌레는 늘 거꾸로 매달려 있다.


대왕박각시 애벌레는 몹시 소심하고 겁쟁이라서 절대 이파리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줄기는 아무리 가늘어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근육을 갖고 있지만, 이파리는 아무리 커도 바람이 불면 쉽게 찢어지는 허세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애벌레는 항상 줄기에다 뒷발을 딱 묶어놓고는 멀리 있는 이파리를 앞발로 끌어당긴다. 너무 먼 곳에 이파리가 있으면 애써 그것을 탐내지 않는다. 먹다가 입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줄기는 입으로 잘라버린다. 이렇게 줄기 끝을 잘라줌으로써, 그 나무는 다음 해에 더욱 풍성해진다.

우리 생가에는 유독 감나무가 많다. 당시에는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남자란 나뿐이어서 무르디무른 나이였는데도 남자 역할을 해야만 할 때가 있었다. 나무에 열린 것들을 설거지할 때였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나무 위로 올려놓고는 아래서 조심스럽게 지휘하였다. 할아버지가 강조하는 것은, 욕심을 부려서 많이 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기면 새들이 고마워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반드시 감이 달린 가지째 꺾어서 따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듬해 새로운 가지에서 순이 나오고 그곳에 감이 매달린다고. 어린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말에 설득당했고 늘 그렇게 가지째 꺾어서 감을 땄다. 그래선지 우리 감나무는 해리할 때만 빼고는, 대체로 가지에서 흔들흔들 출렁거림의 무게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어둠의 시간이 되자 애벌레는 더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 시간에 살아가는 것들을 위로해주는 달빛이 내려오면, 애벌레는 거꾸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자기만의 목소리로 기도를 보낸다. 거꾸로 매달려서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도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신과 중력이 허락하는 무게만큼 살아가겠다는 고백이다. 조금이라도 욕심을 내면 그만큼 힘들어진다. 그렇게 중력으로부터 겸손을 배워간다.


종일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굿판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중력이 그들을 지켜준다. 아무리 비바람이 거칠어도 중력을 받아들이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중력에 저항하면서 나무줄기에 똑바로 서서 살아간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벌레는 늘 중력에 의지해서 살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애벌레의 몸 자체가 중력이라는 뜻이다. 애벌레는 항상 뒷다리로 나뭇가지를 붙들고 몸을 거의 수직으로 늘어트린다. 오직 붙드는 힘만 있으면 된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처럼 흔들리고, 비가 들이치면 이파리처럼 온몸으로 맞이하고, 햇살이 들이치면 이파리처럼 반짝거린다. 그러니까 나무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일부가 되어, 나무에 안기는 것이다.


* 이 책은 12월 중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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