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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이 책┃『예고된 붕괴』 REINVENTING COLLAPSE!

뒤숭숭한 시절이었다. 위기가 일상화된 시기였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연일 미국발 위기를 전했다. 경제는 심리라 했던가. 경제에서 파급된 모든 분야로 위기의 불똥이 튀었다. 환율은 급속도로 올랐다. 주가는 폭락했다.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ANYTHING BUT ROH. 전임정부의 것만 아니라면 무조건 오케이. 애써 쌓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일시에 무너졌다. 촛불이 일어나고 미네르바가 잡혀갔다. 윽박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효과가 있는 줄을 자신했겠다. 그래서 마구 윽박질렀다. 온라인의 언로가 일시에 위축되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우리가 이런 시간, 이런 시대에 살고 있나, 탄식이 쏟아졌다.


그러한 때에 영국에서 가끔 소식을 전해주는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멀리에서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도 이곳 형편에도 늘 귀를 열어두는 분이다. ‘2009년도 미국독립협회 시사부문 수상작’인 책의 서평을 보았는데 최근 고국의 사정을 생각해볼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인 것 같다고 했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을 살펴보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 진실이 스며든 책이라도 했다.


우리 세대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목격하면서 자라났다. 세계의 양대국인 두 나라는 군사, 정치, 경제, 우주 모든 분야에서 여러 나라들에 줄서기를 강요하면서 사실상 세계를 지배해왔다. 현대의 제국이었다. 어릴 때 누구나 미국과 소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는 그 시절 우리 또래가 흔히 거는 내기였다. 그러나 망하지 않는 제국은 없다. 모두 역사 속에서 스스로 붕괴했다. 그 공식을 따라 소련이 붕괴했다. 연방은 생소한 이름의 여러 나라로 독립했다. 유럽으로 붙은 나라도 있고 아시아로 붙은 나라도 있었다.


소련 연방이 완벽하게 붕괴하자 유일한 제국으로 남은 미국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식에 따라 다음의 순서는 미국이지 않은가. 망해야 할 제국은 미국뿐이지 않은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이 이미 붕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세계 제1의 채무국, 제1의 석유소비국, 제1의 군비지출국. 그건 내 짧은 상식으로도 정해진 수순인 것 같았다. 이라크전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그건 미국이라는 유일 제국이 감당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 같았다. 자업자득. 외부의 타격이 아니라 내부 모순으로 인한 스스로의 몰락인 것 같았다. 과연 미국은 소련의 허망한 종말을 뒤쫓고 있는 것일까.


REINVENTING COLLAPSE. 지은이는 드미트리 오를로프(Dmitry Orlov). 이력이 흥미롭다. 구소련 레닌그라드에서 1962년에 태어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에서 살았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소련에서 장기체류하면서 소련의 붕괴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렇게 절실한 경험담을 배경으로 깔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크레믈린이나 백악관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건 어차피 자신이 잘 아는 바도 아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붕괴와 맞닥뜨리고 붕괴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구체적인 붕괴의 양상들―주택, 교통, 고용, 가정, 돈, 식품, 의료, 종교, 에너지―을 중계방송하듯 실감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에 어떻게 적응하며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해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준다. 그래서 맨 마지막 장은 ‘어떤 직업이 가장 좋을까’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이 궁리에서 출간된 것은 2010년 4월이었다. 경제 위기가 한풀 꺾인 뒤였다. 언론의 호평이 따랐지만 판매는 썩 좋질 않았다. 누가 이 책에서 그려준 시나리오를 들이대며 너무 과장된 호들갑이 아니냐고 힐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책과 이런 경험담을 읽으면서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기는 잠시 감추어졌을 뿐 사라진 게 아닌 것이다.


며칠 전 오마바와 후진타오가 만났다. 둘의 만남은 초강대국인 G2의 시대를 알리는 선포식이었다. 둘이 지금은 워싱턴에서 만났지만 언젠가는 북경에서 만날 것이다. 미국은 한 계단 내려오고 중국이 한 계단 오른 것이다. 특히 후진타오의 미소는 네 인생의 전반부는 미소 양강에서 살았으니, 이제 후반부는 미중 양강 체제에서 살라는 사인으로 읽힌다. 지금에서야 막상 그걸 직접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영향에서 범부인 나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한다. 연초에는 제법 나름 큰 그림을 그려보는 시기이니 그런 면에서 알맞은 책이기도 하겠다.


한편 이 책과 관련해서 흐뭇한 뒷이야기가 있다. 한국어판을 미국으로 보냈더니 며칠 후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이 왔다. 저자가 한국어판 표지를 보고 감탄했다면서 표지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디자이너의 동의를 얻어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한국어판은 아직 재쇄를 찍지 못했다. 영어판은 개정판이 나온 모양이다. 아마존에 들어가면 우리 디자이너의 솜씨로 된 개정판이 자리잡고 있다. 영어판본의 초판 표지와 개정판 표지를 비교해본다. 두뇌올림픽에서 미국과 소련 국기를 좌우로 거느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으쓱해진다. 



-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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