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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팀, 슬라보예 지젝을 인터뷰하다!┃『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인디고 | 인디고 글로벌 인문학 프로젝트 팀은 ‘공동선을 향하여 Toward the Common Good’라는 주제로 2012 인디고 유스 북페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선은 무엇이며, 이 문제의식의 의의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지젝 | 공동선common good’과 관련하여 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the common’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선(좋음)good’이라는 단어입니다. 유럽의 전통에서 보자면, 미학은 신, 인간 혹은 우주와 같은 어떤 최고선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언제나 최고의 실체적인 가치로 여기고, 우리 모두는 이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근대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사유에서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말해 이것은 기존의 공동선의 윤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 윤리란 순수하게 형식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률에 근거한 윤리는 정치화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정치화라는 것을 통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공동선'이 우리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제가 공동선이라는 개념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입니다.


오늘날의 공동선은 과연 무엇입니까? 생태학을 예로 들어보죠. 많은 이들은 우리가 비록 정치적으로 다르지만, 지구나 자연에 대해 공통으로 관심을 가진다고들 하죠. 하지만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태학자들의 관점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다른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저의 관점이 아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정치는 윤리에 우선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통속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등 윤리를 정치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선(좋음)’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내리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생태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자연을 위한 생태학은 은폐된 정치적 선택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태계에서의 공동선이란 인간의 대지인 지구를 번영케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왜 우리는 지구를 번영하게 해야 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은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생태학은 매우 이기적이면서도 인간 중심적이고 기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상 자연은 아주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엔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재앙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고차원적인 공동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목적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가 자연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건 참상입니다.”라고 말하고, 생태학자들은 “우리는 보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숲 가까이에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독일의 한 생태학자는 이러한 경향이 생태학적으로는 완전한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로 한 도시를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도시의 오염 수준은 극도로 악화되지만, 일인당 오염 수준은 낮아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보다 많은 지역을 상대적으로 깨끗하게 남겨두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생태적으로 오염되고 더러워진 대도시는 사실상 역설적으로 자연에게는 최선인 것입니다. 태양열을 이용한 작은 자가 발전식 집에서 사는 생태적인 아이디어를 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면, 이러한 집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실질적으로 숲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생태학적 경향에 대한 저의 불신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최고선으로 제안되고, 그래서 우리가 이기주의를 초월하여 그것을 향해 노력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특권들을 우리는 이미 은밀히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디고 | 그렇게 수많은 수식어가 난무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한 이 시대를 선생님께선 어떻게 정의내리시겠습니까?


지젝 | 오늘날은 이론의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낙태 등에 관한 논쟁을 보면, 오래된 종교적 지혜나 논리를 쉽게 적용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유전자 연구를 허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금지해야 할까요? 이 논쟁이 얼마나 복잡한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유럽 가톨릭과 기독교는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므로 유전자 조작을 해서는 안된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저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정말로 단순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인간이 물질로부터 독립적인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왜 유전자 조작을 두려워합니까? 이는 단순히 뇌를 이용하는 것이지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말이지요.


우리는 지금 여기서 매우 위험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엔 다음의 두 가지 표준적인 해결책 모두 적용될 수 없습니다. 하나는 하버마스J. Habermas나 가톨릭 교단 등 보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이를 아예 금지하자는 입장입니다. 무분별한 유전자 조작은 위험하므로 한계를 설정하자는 것이지요. 유전공학은 오직 몇몇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할 때에만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한쪽의 입장은 과학기술에 대한 극단적 낙관주의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술적인 특이성의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 과학기술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두 입장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죠.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아주 중요한 고유의 과제입니다. 유럽 중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서구 사회는 전통적인 권위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상태인 것이지요.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회라는 근사한 말로 표현하는 이 시대의 장점 중 하나는 더 이상 해묵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기를 거쳐야 돼”라고 하면서 묵묵히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지름길이 가능해졌습니다. 싱가포르를 보십시오. 60~70년 이전에 모래사장이었던 그곳은 지금 1인당 소득이 거의 세계 최고인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보통 금융 산업은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싱가포르의 경우는 금융위기 속에서도 국가 경제가 15퍼센트 가량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냉소적인 분석이 아닌, 흥미진진한 사건들입니다. 이는 포스트모던화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결과입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인디고 | 지금 우리는 혼란스럽고도 앞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시절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시대에 이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무력함과 냉소적 회의가 우리를 이중으로 옥죄고 있기도 한데요. 말하자면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론은 무슨 쓸모가 있으며, 어떠한 실천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등의 시선들 말입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 대한 이론의 전복적 가능성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계신 수많은 강연을 통해서 기대하는 실천적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지젝 | 놀라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학생들이 없습니다. (웃음) 저는 항상 연구원으로서만 일합니다. 이것이 제가 공산주의적 탄압에 계속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70년대 초반에 저는 학위를 거의 다 마쳤는데, 그때는 강경한 공산주의 체제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덕에 5년간 실직 상태로 있었죠. 그러고 나서 작은 연구소에서 자리를 하나 주었는데, 지금까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조건은 저에게 거의 완벽합니다. 저는 어떠한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고, 물론 여기저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학생들이 점점 더 싫어져요. (웃음) 저는 학생들이 없는 대학교를 좋아합니다. 정말 그래요.


물론 이 질문은 까다로운 것입니다. 사실 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글쎄요. 대다수는 어떻게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생각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을 겸비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연구원이나 과학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지요.


자신의 직업과 성공만을 위해 일하는 멍청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소수의 도덕적으로 의식 있는 사람들로 양분된 사회를 저는 원치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슬로베니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대학에서 교육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볼로냐 개혁을 보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들이 현재 저지르고 있는 일은 칸트를 인용하자면 '이성의 사적 사용private use of reason'입니다. 말하자면 대학이란 모름지기 국가나 기업 등과 관련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 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급진적 전복을 시도하고,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책임이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하다."



예를 들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문제를 보죠. 파리 근교에서 차량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대개 우리는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을 불러다가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고, 이 지역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분석을 듣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접근법입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 즉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법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대학을 전문가 양성소로 만들고자 애쓰고 있죠. 그것도 아주 대놓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몇 달 전, 영국의 교육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죠. "지금 이 시점부터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교육 등은 국가와는 무관한 일이며, 이는 시민들 각자가 사적으로 해결할 일이고, 대학은 시장의 중개인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이죠. 이는 대학의 철저한 상업화commercialization입니다. 완전한 재앙이지요. 왜냐하면 오늘과 같이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전문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문제를 그저 표면적으로 받아들여서 해석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전문가만 길러내는 편협한 교육 방식을 막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폭넓게 사유하고, 전 지구적인 시각을 가지며, 철학적으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또다시 생태 환경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죠. 2010년 여름 플로리다에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죠. 자, 그럼 사람들은 바다 속 생물들을 위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하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필요로 합니다. 해저 석유 채굴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위험 요소는 무엇인지, 어떠한 산업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하지요. 여러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사람들 속에서의 어떤 양극단, 즉, 이러한 사안들에 관심을 갖고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일에 치여 그저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인슈타인에서 부터 오펜하이머에 이르기까지 진정 위대한 과학자들이 원자 폭탄 등의 발명과 더불어 총체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 지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유전공학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그 어떤 때보다 중요하고 또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며,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지젝과의 인터뷰집은 2월 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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