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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를 번역한 문필가 우석영


Q저술가, 번역가, 편집자로서 호주에서 바쁘게 지내실 듯합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A∥ 얼마 전에 끝내놓은 번역서들이 있는데 그 번역서들의 교정 작업을 하고 있고요, 책도 한 권 쓰고 있습니다. 쓰고 있는 책은 생명을 주제로 한 일종의 철학 산문집이랍니다. 『낱말의 우주』도 그렇지만 이것도 제 주요 저술은 아니고, 이전에 벌여 놓은 일이라 수습하는 형국이랄까요? 옛 성현이 이르길 쓸데없이 일 벌이지 말라 했는데, 일을 벌여 놓아 고생입니다.

중국 송대 사상가, 정치가인 왕안석은 정론문(政論文)에 강했다 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이 정론문에 관심이 컸던 사람이라 이 장르의 글을 쓰는 데 힘을 쏟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글을 잘 쓰려면 식견이 넓고 공부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 저는 늘 글쓰기를 통해 연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그래서 무언가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라는 인상만 주면)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저는 한가함 자체를 하나의 절대 가치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한가함, 그리고 고요는 어미가 태아를 보호하듯 삶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적었을 정도로 저는 여기에 가치를 크게 둡니다. 사정이 이러한 것은 이 한가와 고요의 체험을 통해 다른 창작 작업도 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요. (저자 소개에 아마추어 서화가라 적었는데, 그저 여기로만 서화 창작을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Q이번에 나온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를 독자들에게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요? 마사 누스바움의 단독 저작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데요. 저자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A∥ 저자의 논지, 그 핵심은 아마도 ‘시민 교육’이라는 네 글자로 말해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교육이어야 하느냐’는 주제에 관해 ‘인간 계발(human development)’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계발된 인간의 이념형으로 전제되는 것은 시민입니다.

그러나 누가 시민입니까? 공감 능력을 갖추고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을 갖춘 이, 그리하여 공적 토론의 장에서 제 고착된 생각만 고집스레 말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이, 그리하여 타인과 논리로서 대화할 수 있는 이, 논리적 의견을 다듬어나가고 또 개진함으로써 일정하게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시민입니다. 이러한 시민의 기반이 없는 민주주의는 말뿐인 민주주의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시민 정신의 교육에 상상력, 공감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길러주는 인문교양, 예술 교육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띤다는 것, 이것이 저자의 논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지의 핵심만 언급하고 말면 재미가 없고 실질을 놓치기 쉽지 싶습니다. 더군다나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저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 철학자들의 교육 철학, 인간 철학을 소개하며, 나아가 미국과 인도의 사례를 들어가며 재미나게 이야기합니다. 소크라테스에서부터 매튜 리프먼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이라는 보옥들을 ‘인간 계발 교육’이라는 하나의 실로 꿰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놀이가 교육에 중요하다고 막연히, 어렴풋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왜 그러하냐?’는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놀이는 중요하다, 이렇게 막연히 생각하면서도 이 질문에 말문이 막히실 분은 분명 이 책을 즐겁게 읽으실 겁니다.

저자에 대한 소개, 말씀하셨는데 소개는 책 속에 잘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자처럼 주목할 만한 철학자, 사상가, 저술가들이 상당히 많음에도 그들의 저술이 한국어로 잘 번역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출판의 시장 의존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그 공공성을 강화시키는 길이 해법일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래야 한국의 시민 교육, 교양 교육도 비로소 제대로 살아날 겁니다.


Q이 책의 경우 선생님께서 번역 출간을 제안하셨는데요. 적극 추천하신 특별한 계기나 까닭이 있었나요? 그리고 이 책을 처음 어떻게 접하게 된 경로도 궁금합니다.

A∥ 보통 번역자가 출판사에 번역 출간을 제안할 경우 책이나 원저자의 가치도 생각할 테지만, 그 책의 번역 업무가 자신의 지적 성향, 삶의 방향과 어느 정도 맞는지 여부도 생각할 겁니다. 저는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철학자의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고 그래서 이 책 역시 눈에 띄게 된 것이랍니다. 저자가 철학자인 데다가 타고르와 듀이의 철학을 주로 논의한다는 말에 끌렸지 싶습니다.

누스바움 교수를 알게 된 것은 한국을 떠나기 전 김우창 선생님의 저작을 통해서였지 싶습니다. 저자의 본래 전공이 고전철학, 윤리학 쪽인데요. 저도 이 분야에 관심이 가서 늘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여기 신문의 북 리뷰 섹션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한 듯합니다.


Q이 책의 원제목은 ‘Not for Profit’입니다.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관련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네, 이 책은 현대 고등교육계의 인문학․예술 관련 프로그램들 예산 삭감, 폐기 등의 트렌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경제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인데, 인간의 삶이 마치 경제를 위한 것처럼 전도되어버린 현상에 대해, 그리고 교육마저도 경제성장 본위로 가는 흐름에 대해, 즉 경제성장에 가시적인 효과를 보이지 않는 분야, 인문학 분야를 교육의 영역에서 거세하는 흐름에 대해 저자는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냅니다.

조금 달리 말하면, 책의 주제는 교육이고 구체적 사례담은 미국과 인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 주제는 더 큰 질문들, 즉 ‘무엇을 위한 교육이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느냐’는 질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또 그 질문들에 감싸져 있습니다. 소위 이러한 질문을 해보고 그 질문에 대답해볼 때,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한, 경제성장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전도를 비판하는 작업을 시민 교육이라는 교육 본연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업에 일치시킵니다.


Q이 책을 읽는 동안 오늘날 한국 교육 현실과 닮은 부분들이 많아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습니다.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독자들이 있나요?

A∥ 이 책은 우선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고등교육의 현실에 대한 책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자가 논의하고 있는 여러 교육 사상가들의 사상과 실천을 살펴보면, 유아교육에서부터 고등학교 교육까지도 다루어지고 있거든요. 특히 태어난 후 유아가 어떤 과정으로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가고 자기-혐오감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지에 대한 저자의 아동심리학 강연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사람의 성장 과정에 관심을 둔 모든 이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책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제가 옮긴이의 글에서도 적었듯, 현재 한국의 교육 문제는 지금 한국 사회의 한 가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척추를 관통하는 문제거든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어 교육에, 사교육․공교육 문제에 삶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학벌 사회에, 수도권 중심 문화에 치를 떨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사회의 주류에 가려고 안달을 합니까? (또 주류나 근처에 진입한 이는 얼마나 어리석게도 쉽게 치복의 노예가 됩니까?) 경쟁주의적 경제 질서와 문화, 경제성장 지상주의의 질서와 문화의 수술 없이, 삶의 행복 이념의 일신과 재구성 없이, 현 교육 제도와 문화로 인한 숱한 불필요한 고통과 잡음은 해결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닙니다. 대개는 우리는 태어나 피교육자로 살다가 (어느 정도 휴식 기간을 거쳐)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는 교육자의 입장에서 살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인생 과정 자체에서 이 교육이라는 문제가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힌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뿐인가요?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했듯 ‘배우는 존재’라는 게 모든 생류 가운데 인간만의 독특성이거든요. 우리는 늘 배움을 갈망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기이한 생물입니다.

이런 점을 두루 살펴볼 때 교육의 이슈는 언제라도 단지 교육계가 곧 생업의 마당인 사람들만의 이슈가 아니라 삶과 성숙이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시민들 모두의 이슈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학생이나 교사만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분들이, 자기-성장에 관심을 두는 많은 분들이, 오늘날의 한국 교육을 근심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근심하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어주었음 합니다. 너무 거창한 바람인가요^^


Q나에게 교육은 ㅇㅇㅇ이다. ㅇㅇㅇ 안에 들어갈 말을 골라주신다면요?

A∥『예기』에 교학(敎學)이란 말이 나옵니다. 앞의 교는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고, 뒤의 학은 학생이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것이죠. 교육은 앞의 교에 상응하는 것으로, 선생 중심적 단어입니다. 즉 단어로만 보면 선생이 교육의 주체인 것이지 학생이 교육의 주체인 것이 아닙니다. (학생은 학습의 주체이죠.)

그런데 교육의 실천 마당에서 학생 또한 주체가 되어야 옳겠죠. 아니 학생-선생과의 대화 관계가 그 관계의 각 항에 있는 이들 모두를 더 드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과정이 참교육의 과정이겠지요. 해서 ‘교육’이란 말의 자리에 ‘교학’이란 말을 넣어보고 싶습니다.

교학이란 ㅇㅇㅇ이다. 저라면 이 공란에 ‘자전거’라는 말을 넣겠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란 自轉車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자는 자가 스스로[自] 굴러갈[轉]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배우는 자는 그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구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주와 역사 내 낱 역할체로서, 그 안의 단독자로서 당당한 이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구르는 법을, 굴러 ‘위로 올라가는 법’을 ‘드높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자극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극에 그쳐야 한다, 뭐 그런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자극에만 그쳐야 한다’는 말의 뜻은 교[육]의 강압성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주역』의 괘 중 교육을 다룬 괘로는 산수몽 괘가 있습니다. 이 괘에 보면 교사에 상응하는 두 효, 학생에 상응하는 네 효가 나옵니다. 교사에 상응하는 효는 구이와 상구인데, 구이는 포몽(包蒙)이고 상구는 격몽(擊蒙)입니다. 포몽이라는 것은 몽매한 이를 포용한다는 것인데 어머니의 느낌이 납니다. 격몽은 몽을 쳐서 일깨운다는 것인데 가부장제의 위엄 있는 아버지의 느낌이 납니다. 격몽을 벗고, 격몽을 지양하고, 포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자전거’에 담고 싶습니다.


Q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을 비롯해 인도 등 여러 나라의 교육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년간 호주에서 생활하고 계신데요. 호주에서는 어떤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호주 교육의 면모를 말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A∥ 고등교육(대학 단계 이상의 교육)과 그 이전 교육을 나누어서 말씀 드리기로 하죠. 전 호주의 대학은 체험해봤지만 그 이전 단계의 교육 기관은 체험해보지 못해서 후자는 잘 모르거든요. 일단 대학을 말씀드리면, 미국식이 아니라 영국식 체제죠. 대중문화를 빼고는 전체 사회나 사회 내 조직들의 얼개가 다 영국식이라서 교육도 거의 영국식이라 보면 아마 틀리지 않을 겁니다.

유아-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을 보면, 한국에서 목격할 수 있는 훈육식, 통제식 교육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체벌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유아-초등학교 교육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바로만 말씀드리자면, 누스바움 교수가 말하는 놀이-교육을 굉장히 강조하는 듯하더군요. 또 영국 시험과 비슷하게 대입을 위한 에세이 시험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한국의 논술은 제가 잘 몰라서 비교가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또는 7학년만 되어도 학생들은 에세이 작문 연습을 하는데, 바람직한 교육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에서 과목수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런데 호주의 중․고등학생들 (여기 개념으로는 7~12학년 학생들)의 경우 과목수가 한국에 비해 굉장히 적어요.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적은 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지요. 12학년(고3)의 경우 다섯 과목인가, 여섯 과목인가만 하면 되지요. 한국과 비교하면 천국이지요. 물론 여기도 경쟁은 있지만, 경쟁에 밀려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는 역사 교육이 7~12학년 교육 과정에서 필수 교육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세계사나 근현대사를 선택하지 않은 이들은 세계나 근현대사의 실상에 무지하기 쉽고 대학에 들어와 자신이 독학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죠. 호주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다문화사회를 지향하고 있고, 실제적 사회 기반이 다문화적이므로 역사 교육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 하나 한국과 관련하여 말해볼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는 10학년(고1)을 마치면 TAFE(일종의 직업기술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생각이 없는 학생은 한국의 고1 과정만 끝마치고 바로 학교를 빠져나가 성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오직 대학에 갈 생각이 있는 학생만 고2로 올라가는 거죠. 이렇게 이미 충분히 성장했고 공부에 취미가 없는 학생은 일찌감치 고등교육 외곽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직업기술교육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풍토가 먼저 마련되어야 합니다. 즉 사회의 혁신만이 교육 혁신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Q얼마 전 출간된 『낱말의 우주』를 집필하셨고,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필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집필할 때와 번역할 때 느낌이 다를 것 같은데 어떤지 궁금합니다.

A∥ 쓰는 일은 실을 뽑아내 그 실로 옷을 짓는 과정과 비슷합니다만, 실을 뽑아내는 이가 그 실의 성질에 대해서 뽑아내는 순간 다 알지 못한다는 재미난 면이 있습니다. 반면 번역 작업은 이미 지어진 옷을 보고 그 옷의 실을 다 해체한 이후 그 실로 새로운 옷을 짓는 과정과 비슷하죠. 후자의 경우도 일종의 창조․창작이라 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전자처럼 옷의 재료가 되는 실이 무엇인지 창작자 자신도 모르는 체험은, 그리하여 나타나는 창조의 희열은 체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언명이 모든 글쓰기에 해당되는지는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제가 쓰는 유의 산문의 경우엔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Q녹색정치 소식지 《하모니아》의 공동발행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모니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어떤 소식지인지요? 어떻게 창안하게 되셨는지, 어디서 어떻게 접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A∥ 《하모니아》는 현재 온라인 미디어랍니다. 사이트 주소는 www.harmonianews.net 이고요. 아직 발돋움 단계라 보잘것없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여럿이 자발적인 선의로 모두의 일을 도모해나가는 것에 관심이 컸습니다. 즉 공동성, 자발성, 선의․정의라는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과 일 말입니다. 여기에 창발성․창의성이라는 가치를 더해 총 네 가지 가치를 말해보고 싶군요. 이 네 바퀴로 굴러가는 녹색 지성공동체의 씨앗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듯합니다. 현재는 온라인 미디어이지만 장차 종이 소식지 형태도 갖추어보려고 하기에 소식지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홍보성 멘트를 한마디 할 수 있을까요? 《하모니아》는 현재 신생아 단계고 평등 구조를 지향하고 있답니다. 자문위원을 제외하면 누구나 다 똑같이 공동발행인이고 녹색 의제에 관심을 둔 이라면 누구라도 공동발행인으로 참여할 수 있어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관심 있으신 분들이 있다면 서둘러 참여해주시길. harmonia.news@gmail.com으로 이메일 주시면 됩니다. 열린 터이니 언제든 오세요.


Q평소 어떤 책을 즐겨 읽으시나요?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꼽는다면요?

A∥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 책을 두려워하는 사람에 속한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난독증 환자라는 것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던데요, 전 난독을 경계한답니다. 말인즉슨, 저 같은 경우 책을 굉장히 선별해서 읽는 편이랍니다. 어떤 기준일까요? 한번 생각해보면 1) 글쓰기에 필요한 책 2) 교양 함양에 도움이 될 만한 책 3) 삶의 구체적 행복에 보탬이 되는 책 4) 그저 담담히 읽어보는 책, 이를테면, 그림, 사진, 편지 또는 시.

전 이전에는 문학을 많이 읽다가 요새는 많이 읽지를 않고 철학을 많이 읽어서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철학 작가를 이야기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문학 작가든, 철학 작가든, 아니면 통칭하여 문필가든, 제가 좋아해온 부류는 논리적인 면모와 예술적인 면모를 겸비한 이들이었지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이지만 아도르노나 사르트르, 토마스 만, 루 쉰, 이런 사람들이 다 이런 부류거든요. 그저 논리적이기만 한 글, 그저 문학적이기만 한 글은, 또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중된 작가는 이상하게도 저를 사로잡지 못하더군요. 이를테면 서경식 선생 같은 분을 생각해보세요. 분류하기 힘든 이. 이런 이가 매혹적이지 않나요?

문예라고 할 만한 것은 이즈음 거의 읽지 않지만 아직도 시는 간혹 찾아 읽으니까 시도 더불어 말해본다면, 현존 한국 시인으로는 조정권 시인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근작 중 너무 고음한 흔적이 있는 시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시들 가운데에는 일품인 것들이 많습니다.


Q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활동도 하고 계십니다. 세 채널의 용도가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요.

A∥ 저는 예전 결혼하기 이전에 캐나다에 거주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난생 처음 블로그란 걸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제가 온라인에 친해진 것은 이 해외 생활, 즉 한국어와 떨어져 지내는 생활에서 체험한 ‘언어의 고독’과 연관이 있습니다. 트위터도 이런 ‘필요’의 연장선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좀 시들합니다. 요새는 페이스북에서 온라인 말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라는 게 한국사회든 여기든 아직 식지 않는 뜨거운 주제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앞으로 이 소셜 미디어의 힘이 더욱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아울러 블로그는 잘만 운영된다면 1인 미디어로도 기능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개인 기반 미디어가 발전하고 있는 것, 또 발전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물론 인터넷․스마트폰 과잉 사용으로 인한 문화적 폐해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관련해서 하나만 더 지적하고 싶군요.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일종의 광장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달리 말해 시공을 초월해 공적 논의를 할 수 있으면서도, 그 논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어느 만치는 자신의 페이지에서 보여줄 수 있는 툴이 마련되었다 할 수 있어요. 블로그의 경우는 1인 미디어의 툴이 마련되었다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이 기술적 진보를 그 기술의 사용자들의 정신과 지적, 인격적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랄까요, 다른 한편으로 실력이 있는 이들은 이 새 미디어를 외면하기도 하는 형국이랄까요, 전 사실 소셜 미디어를 깊이 파고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어렴풋이 듭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시민 능력의 계발이 기술적 진보와 발맞추어져야 하겠다, 실력 있는 이들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광장 생활을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Q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 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재미있는 책이랍니다. 즐독하시길^^*






우석영 ┃ 연구보다는 시서화 창작을 (즉 놀이를) 더 좋아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자이자 문필가. 작품의 완성보다는 禪에 관심을 둔 아마추어 서화가. 녹색정치 소식지 《하모니아》의 공동발행인이기도 하다. 연세 대학교, 시드니 대학교 대학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대학원을 유랑하며 사회학, 문학, 철학(세부전공: 창조성의 존재론) 분야의 내공을 쌓았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으로도 심리적 시간으로도 학교보다는 산중에서, 도서관에서, 서재에서 홀로 연마한 독학자에 가깝다. 지은 책으로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옮긴 책으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 『Down to the Wire: Confronting Climate Collapse』(근간) 등이 있고, 논문으로 「작가와 독자의 존재론: 사르트르, 바르트, 바슐라르」(영문) 등이 있다. http://twitter.com/reading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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