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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꽃산행 꽃詩>를 펴낸 이굴기 작가 인터뷰


Q‘인왕산’을 테마로 한 『빛으로 그리는 신인왕제색도』와 『인왕산 일기』, 이 한 쌍의 책을 통해 하늘과 날씨라는 주변상황에 따라 인왕산과 서울의 모습이 1년 365일 무한 변주됨을 섬세하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전국의 들과 산으로 발품을 넓혀 봄, 여름, 가을, 겨울 드나들면서 『꽃산행 꽃詩』를 완성했습니다. 그 출발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요? A 사무실이 인왕산 아래에 있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서 점심시간마다 산에 올랐죠. 데스크다이어리에 표시를 해두었는데 어느 해는 100번을 훌쩍 넘을 정도였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위에 적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마무리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 숱하게 산을 드나들었지만 산에 사는 나무나 꽃 이름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이름 하나 안다고 식물을 아는 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또한 이름으로 식물과 나는 최소한의 접촉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 사정이니 내가 아무리 책을 내고, 산을 다닌다 한들 그저 덜렁덜렁 돌아다니기만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이나 꽃이 자연이 표시하는 문자라고 했을 때 나는 그저 문맹자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말미에 이제부터는 산이 아니라 산의 나무나 꽃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겠노라는 다짐을 적어놓았죠. 그 다짐을 실천하고 증명한 것이 이번에 내는 책의 출발이었습니다. Q지난 3년간 제법 많은 산을 돌아다니며 꽃의 모습들뿐만 아니라, 꽃이 자연과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풍경에도 주목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특별히 맞춤한 시들이 떠오르곤 한다고 했습니다. 평소 시들을 많이 접하며 지내시는지요? A 한때 멋모르고 시의 세계에 입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게 속한 시의 밑천이 들통나는 건 금방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언어도 한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았죠. 그래서 시의 세계에서 힘껏 멀리멀리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다고 시 읽기마저 그만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시란 인간 정신의 정화라는 걸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꽃산행을 거듭할수록 꽃도 꽃이지만 꽃들이 자연에서 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산속에는 식물도 많았지만 이야기 또한 그득했습니다. 꼬물거리는 곤충들, 말라버린 잎사귀들, 서로를 부둥켜 앉고 있는 연리지들, 골짜기를 찌르고 내려꽂히는 햇살들. 나의 눈엔 모든 게 사연이고 스토리였습니다. 그럴 때 그간 읽었던 맞춤한 시들도 신통하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자연에서 그런 상황을 접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는데 나보다 훨씬 앞서서 그런 시심을 일구어낸 시인들에게 탄복을 많이 하였습니다.

Q책에 실린 43편의 꽃과 시의 조우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꼽아주십시오. A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이리저리 하는 편입니다. 미당이 탁월하게 짚어낸 것처럼 소쩍새, 먹구름, 천둥과 그리고 국화꽃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뿐이겠습니까. ‘나’ 또한 그들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처음 천마산으로 꽃공부 하러 갔을 때 산에까지 따라온 내 그림자를 넣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어느 글에도 밝힌 바 있지만 나의 그림자는 태양과 지구 사이에 내가 낑겨 있을 때 벌어지는 놀라운 자연현상이라는 것도 문득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산에 가면 사진도 많이 찍는데 원래 사진사는 사진에 나올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예외지요. 어느 해 고향 갔다가 마을 들판에서 가로수인 느티나무가 그림자를 들판에 척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나도 성큼 다가섰더니 노루새끼처럼 내 그림자도 보이더군요. 그때 생각난 시 한 편. “전신응시명월 기생수도매화. 나의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흔감한 기분으로 서울까지 운전해 오는 동안 시를 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노루귀  ©이굴기

Q길마가지나무, 노루귀, 홀아비꽃대, 까치무릇 등 그 이름도 낯선 식물들이 책에 많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얼굴을 익히고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 같은데요, 꽃산행 초심자들에게 전해줄 중요한 조언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A 내가 아직 초심자입니다. 그런 조언을 해드릴 자격을 아직 갖추질 못했습니다. 꽃 이름 하나 안다고 그 식물을 다 아는 건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번 책도 식물에 관한 전문적인 견해를 기대한 분들이라면 적잖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저 나름의 상상과 해석에 기대어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제 책을 실마리로 여러 전문가들의 책을 접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타리 ©이굴기

Q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은 <꽃산행 꽃詩>를 “(...) 그의 탐미가 가관이다. 백두산 가다 개불알꽃에 매달린 빗방울을 넋놓고 들여다보며 딴 세상 게 있노라 참언하지를 않나, 벌 두 마리 엉겅퀴 꽃잎에서 복상사 무릅쓰고 벌이는 열락을 얼씨구나 훔쳐보는 그 짓거리라니. 천생 시인의 놀음이 이토록 멋지다. 무엇이 그를 호렸을까.(...)”라고 평하였습니다. 이 글에서처럼 무엇이 그 발걸음을 자연으로 향하게 하는지요? A 저를 설명하는 말이 참 많이 있겠죠. 남자, 56세, 경남 출신, 안경을 끼고, 백발. 덩치가 띵띵함. 육군병장…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자주 외가에 갑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신 외삼촌 내외가 사시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저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외가를 제일 좋아하는 놈. 외가에 가면 어머니 오셨다고 작은 잔치가 벌어지는데 그 자리에서 술 한 잔 먹고 마당에 나서면 별이 쏱아집니다. 조금 떨어진 질번디기 능선에는 내가 참 좋아했던 외할머니 산소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 있으면 아, 이 자리에서 그냥 발밑으로 꺼져들어가도 좋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꽃산행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추가되었습니다. 술에 흥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가 그냥 이 자리에서 발밑으로 꺼져들어가도 좋다! 라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작고 여린 야생화 앞에 몸을 구부릴 때, 몸을 꽃의 제단 앞에 던질 때, 다시 말해 굴기(屈己)할 때, 세상의 고요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때, 그런 황홀경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산을 피해 집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Q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A 꽃은 나무의 생식기관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나무만의 일이겠습니까. 나무 혼자서 꽃을 피고 지게 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운동화를 신은 채 땅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듯하지만그렇다고 땅과 떨어지지도 못합니다. 다 연결되어 있는 셈이지요. 나무를 볼 때 나무가 거느리고 있는, 나무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나무를 지지하고 떠받들고 있는 나무의 주위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좋은 물건을 포장할 때 보기 좋은 매듭을 만들어 마무리를 합니다. 꽃은 지상의 세계가 마무리되는 한 표시입니다. 나무와 그 나무의 주위가 솜씨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 매듭을 푸는 일, 다시 말해 꽃을 보는 일이 어쩌면 세상의 비밀을 푸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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