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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어느 화학자의 초상>을 펴낸 진정일 교수 인터뷰


Q. 그동안 『시에게 과학을 묻다』 『소설에게 과학을 묻다』 『교실밖 화학 이야기』 등을 펴내며 과학과 문학, 과학과 사회 등 두 문화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해오셨습니다. 이번에 출간한 『어느 화학자의 초상』은 주제나 글의 분위기 면에서 전작들과는 다른 결을 지닌 것 같습니다. 2019년에 펴낸 『오늘도 나는 과학을 꿈꾼다』와는 어떤 점들이 비슷하고 또 다른지요?


A. 두 책의 글들이 저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과학자 진정일의 모습을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나 할까요. 이번에 출간된 『어느 화학자의 초상(肖像)』에는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일들과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올바른 의미와 가치를 좇아온 제 삶의 궤적에 동감하고 박수를 보내주기를 바랐습니다. 사회에 대한 울분보다는 아름다운 희생, 남을 위한 따뜻한 베풂과 사랑, 서로에게 힘을 보태주는 함께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 올해로 여든이 되셨고, 화학자로 살아온 지 60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액정 고분자의 세계적 개척자이신데, 책제목 그대로 ‘화학자의 초상’은 어떤 실루엣을 하고 있을까요? 연구실에서 열중하느라 늘 뒷모습을 보여주는 과학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A. ‘과학자’ 또는 ‘화학자’ 라는 딱지(라벨)를 달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가능성이 큽니다.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과학자의 뒷모습은 신비함과 동시에 ‘재미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좀 색다른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오랜 잉태와 산고 끝에 얻은 새로운 발견 또는 결과물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앞모습은 위대한 정복자의 희열에 찬 빛나는 얼굴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내용이 직설적으로 기술되지는 않았으나, 이번 책 갈래 속에는 여기저기 그와 같은 저의 앞모습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로서 정말 ‘신나는 일’을 많이 경험했답니다.


Q. 고려대학교에서 퇴임을 하신 후로도 국제학회 참석, 해외 학자들과의 교류를 끊임없이 해오고 계십니다.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 회장, 아시아 고분자학회 연합회(FAPS) 초대회장, 아시아 과학편집인 협의회(CASE)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하실 때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나 기억이 있으시다면 들려주세요.


A. 저에게 국제교류 협력 및 공동연구는 뿌리 깊은 얘기입니다. 우리들보다 앞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및 영국 등의 과학자들과는 40년 이상을 상호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후에는 중국, 베트남,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일부 공동연구도 해왔습니다. 과학자로 50여 개국을 방문하였고, 과학 특히 화학의 뿌리를 내리도록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동시에 제 연구의 내용과 우수성도 알릴 기회들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국제활동을 비교적 활발히 했으며, 그러는 동안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서너 번 가졌는데 두 번의 방문이 특히 제 기억에 남습니다. 2007년에 러시아 학술원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모스크바 북쪽에 위치한 듀브나 연구소를 방문하도록 러시아 측에서 제 일정을 짜놓았더군요.

이 연구소는 오래전부터 이온 가속기를 이용해 새로운 원소(모두 방사성입니다.)를 합성하고 있는 유명한 연구소입니다. 그때 연구소장인 오가네시안(Oganessian) 박사를 만나 한·러시아 공동연구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국내 물리학자들이 국내에 자체적으로 중이온 가속기를 설치하려고 해 공동연구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듀브나 연구소 방문 시 그곳 연구자들이 원자번호 118번 원소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듣고 놀랬습니다.

그 후 원소 주기율표를 1869년에 처음으로 제안한 멘델레예프의 고향 토볼스크에서 초중원소들의 발견과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듀브나 연구소 팀이 자기들의 업적을 발표하더군요. 결국 IUPAC의 최종결정에 따라 원자번호 118인 원소의 이름을 오가네손(Oganesson)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원소 중 원자번호가 가장 큰 원소입니다. 주기율표에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가네시안 박사는 자기 이름이 주기율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은 셈입니다. 주기율표가 존재하는 한 그의 이름은 그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름이 쉽게 잊히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대단한 영광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이온 가속기를 이용한 연구에서 이와 같은 업적이 나와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주기율표에 남기를 기대합니다.


Q. 중고등학교에서 교수님께 강연 요청을 많이 해오는데, 거리에 상관없이 미래의 과학자들을 만나러 자주 다녀오십니다.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눈 느낌들은 어떠신지요?

A. 맞습니다. 요즈음 제가 가장 즐기는 일이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강연 내용은 각 학교의 요청에 따라 ‘1)화학이 가져다 준 신비한 세계-21세기의 재료 고분자 재료의 과학, 2)융합시대를 어떻게 준비할까?, 3)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세계, 4)과학기술과 사회-바람직한 관계’ 등입니다. 제 과거를 회상하여 보아도 고교시절이 제 삶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루고 싶은 꿈도 많았고, 인생의 목표도 한없이 크고 높았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시기에 도움이 되는 멘토를 젊은이들은 찾고 있습니다. 제가 고교생들을 만나 과학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누고 싶어하는 더 광범위한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의 긴 인생 경험이 헛되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시간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우수한 젊은이 한 명이라도 과학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끈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화학자의 길로 제대로 안내하고 싶습니다. 제 강연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석학과의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고교 학생들과 담당 선생님들이 제 강연을 평가해 한림원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전해 듣기로는 제 강연이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강연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초·중등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과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 사회에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가 이 사회에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라고 있습니다.


Q. 그동안 학부생은 4000여 명, 석‧박사과정 제자들도 150여 명이나 된다고 하셨습니다. 뒤이어 이공계에 진학할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A.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저는 과학자의 길은 수도자의 길과 유사하다는 말을 종종 해왔습니다. 소위 ‘성공’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전념’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진리를 찾고 알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여정입니다.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성취의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달콤함을 맛보는 순간은 매우 짧습니다. 과학은 ‘정지’를 용납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창의성’이니 ‘창조적’이니 하는 천재성은 ‘전념’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전념’이라는 표현이 폐쇄성을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21세기는 융합적 사고력과 세계적 협력에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는 ‘세계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선되고는 있으나 우리나라의 과학계는 아직도 초연결사회 및 시대의 요구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미래 주인공인 젊은이들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가 필요로 하는 과학자의 미래상을 깊이 이해하여 세계적 경쟁에 앞서기를 바랍니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풀어줄 수 있는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Q. 과학칼럼, 일상의 에세이 등 꾸준히 글을 쓰시는데, 글쓰기는 교수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글쓰기는 저에게 기록을 남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비교적 긴 제 인생을 통해 얻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글로 전달할 수 있어 큰 보람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제 글 내용에는 종종 개인적인 소재이지만 역사적 기록이 등장합니다. 많은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한 내용이라고 믿습니다. 그 점들이 우리 사회와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기록으로 남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유에 덧붙여 글쓰기는 저에게 특별한 시간과 경험을 줍니다. 비록 머릿속에 담겨 있던 내용을 글로 쓰지만, 단순히 글로 표현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생각들을 정리하고 경험, 추억 및 생각을 반추하는, 즉 생각에 의미를 더 부여하는 중요한 시간이 됩니다. 언젠가는 대학시절의 일기장을 들치며 ‘젊은 날의 추억’ 또는 ‘젊은 날의 사랑’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 꿈이 실현될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요. 세계 곳곳을 다니며, 호텔방에서 써놓은 조각글들도 저에게 색다른 기쁨을 줍니다.


Q.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A. 앞에서 이미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짧게 답하겠습니다. 가르침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던 제 삶이 누군가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음을 주기를 바랍니다. 치열한 노력과 끈질긴 인내, 끝없는 연마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태도, 열린 마음과 연결의 중요성,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참 가치를 깨닫기 바랍니다. 감동이 있는 읽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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