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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여정


 

여행 첫째 날: 1968년 7월 8일 월요일 [ZAMM 1장부터 3장까지]

여정: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를 출발하여 레드 리버 밸리를 거쳐 노스다코타 오크스에 도

숙소: E&I 모텔 (오크스 소재)

 

아직 우린 여행 첫날에 머물러 있다. 여행 첫날엔 참 많은 상념이 깃든다. 여행을 떠나는 연유가 무엇이든 일상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세상도 우리도 모두 낯설다. 우리 감각은 리셋되어 일상에 없던 상념이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지난 날의 화자처럼 정신질환 증후를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옛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길에 어찌 상념이 깊지 않을까? 책을 읽는 우리도 첫날에 참 오래 머물 밖에 없다. 하지만 첫날에 오래 서성이는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책 무더기에서 책 고르는 기준을 말하며, 어찌되었든 첫 사십여 쪽을 꼼꼼히 읽고 판단하라고 했다. 사십 쪽 안짝에서 책이 그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우리가 부족해서 맞지 않거나 책이 부족해서 맞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 내도 그리 성마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코는 책을 가려 읽을 방편으로 첫 사십여 쪽을 말했지만, 그것은 또한 우물에 마중물 붓듯 책에 온전히 스며드는데 필요한 마중 독서의 최소량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사십여 쪽 읽는 동안 상상의 벽을 쌓아 현실 차단하고 허구의 세계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없다면, 그 책이 우리에게 맞는가를 떠나 우리는 그 책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책에 두루 맞는 기준이라 할 수 없어도, 대체로 사십여 쪽 분량은 바깥 세계를 차단할 무형의 공간을 쌓을 수 있는 최소량이 되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ZAMM의 첫날 여정의 분량이 대략 그와 같다.


이 글을 쓰는 사람에겐 당연한 노릇이지만 리트머스 실험으로 첫 사십여 쪽 읽기를 말하자면 ZAMM은 끝까지 읽어볼 만한 책이다. 마중 독서로 첫 사십여 쪽 읽기를 말하자면 ZAMM은 많은 공을 들여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때 그 사십여 쪽은 우주선이 행성에 돌입할 때 통과해야 하는 마찰력 큰 대기권과 같다. 진입은 어려우나 일단 들어서면 우리를 빨아들이는 그 힘에 자신을 맡겨도 된다. 이럴진대 독서는 시련이면서 유혹이다. 일정 깊이까지 밀고 들어가지 않으면 책은 우리를 튕겨내고, 다시 진입할 동력마저 잃으면 우리는 영영 우주 미아가 된다. 그러나 그 시련 견딜 수 있다면 책의 세계는 그 어떤 허구의 세계보다 넓고 깊다. 책으로써 독서 공간을 지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르는 매혹의 길을 닦는 일은 독서의 고통스러운 희열이다.


여행을 말하는데 길과 이정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정이란 추상의 지도와 현실의 이정표를 길 위에서 하나하나 맞추어가는 여정이다. 여행자를 닮기 마련인 여행의 개성은 바로 지도와 이정표를 어떻게 맞추어 나가는가에서 나뉜다. 어떤 여행기든 첫 사십여 쪽에서 길과 이정표 얘기는 빠질 수 없다. 화자는 어떤 길을 어떻게 취하는가. 무엇보다 그는 지선 도로[secondary roads]를 탄다. 그가 꼽는 좋은 길이란 다음과 같다.



1)굽이굽이 고갯길twisting hilly roads

2)숲이나 들판 그리고 과수원이나 풀밭을 바짝 끼고 가는 길 

roads where groves and meadows and orchards and lawns come almost to the shoulder



2장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달린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굽이굽이 고갯길이 좋은 이유는 모터사이클 여행자로서 굽이마다 모터사이클과 함께 몸을 기울이는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길과의 일체감을 더 크게 주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 여행에선 자동차와 달리 차창 틀이 없기에 사물과 온전히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렇게 따지면 흔히 오픈카라고 하는 카브리올레나 선루프 장착 차량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며 반박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굽이진 길을 따라 모터사이클과 함께 몸까지 기울여야 하는 그런 맛을 네 바퀴로 굴러가는 카브리올레에선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굽이진 고갯길과 곧게 뻗은 평탄 대로 사이에는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평탄 대로에선 길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 미국처럼 평탄 대로가 끝없이 펼쳐진 곳에선 사람이 계속 가속페달을 밟고 있지 않아도 일정 속도를 내게 해주는 크루즈 기능을 즐겨 사용한다. 거의 자동운전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굽이진 고갯길에선 그렇게 할 수 없다. 매 순간 우리 감각은 길을 살피고 길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온전히 길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어찌 온전한 목적지에 이르길 바랄까. 이로 인한 폐해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천편일률. 실비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맞은편에서 차를 타고 오던 사람들 말이에요. (…) 첫 번째 운전자 표정은 아주 슬퍼 보였어요. 그 다음 운전자도 똑 같은 표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다음 운전자와 또 그 다음 운전자도 모두 같은 표정인 거예요.”1



자기에게 반응토록 하며 일체감을 요구하는 길이면 다 되는 게 아니다. 화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바로 인간의 삶이 자연스레 어우러진 길이어야 한다. 굽이진 고갯길에 숲이나 들판 그리고 과수원이나 풀밭을 바짝 끼고 가는 길에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의 전반적인 삶의 속도라든가 인간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만물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 the hereness and newness of things”. 그렇다고 해서 굽이진 길이 그리고 그런 길에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우리를 우리가 바라는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건 아니다. 길은 길일 뿐,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길을 어떻게 가느냐는 바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런데 굽이굽이 고갯길과 은둔의 삶을 자족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길을 갈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그런 길의 이정표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눈에 잘 보이도록 세워져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네비에도 나오지 않는 길들이 태반이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가는 건 좋지만,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넋 놓고 길을 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조건이 주어진 셈이다. 화자는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추측항법에 의하여 by dead reckoning (시각에 의지하지 않고 측정장비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

2)이미 발견한 실마리에서 유추하여 by deduction from what clues we find



이때 ‘길을 잃다’는 것은 특정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잠정적인 목적지가 있어 거기에 이르는 최단거리에서 크게 벗어났을 때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게 아니다. 설사 그 목적지로 가는 ‘제대로 된’ 길 위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그는 길을 잃은 것이다. 화자는 오히려 “’어디로 가야 한다’는 부담(pressure to ‘get somewhere’)”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행을 떠나는 화자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어디로 꼭 가야 하는 법은 없지만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어디로 꼭 가야 하는 법이 없기에 그가 일단 기수를 잡는 곳은 ‘아무 곳도 아닌 곳(nowhere)’이며, 그가 오르는 길은 아무 것도 아닌 곳과 아무 것도 아닌 곳을 연결하는 길이다.



“이 지방으로 다시 모터사이클 여행을 오게 되어 좋다. 이곳은 유명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를테면아무 곳도 아닌 곳[a kind of nowhere]인데, 그래서 사람 마음을 끄는 곳이다.”2


“지도 위의 선이 구불구불하다면 좋은 길이다. 고개가 있다는 말이다. 소읍과 도시를 잇는 주 도로는 좋은 길이 아니다. 언제나 최고의 길은 아무 것도 아닌 곳과 아무 것도 아닌 곳을 잇는 길이다.”3



결국 지도 위 어느 한 점에 도달하기 위해 지도를 펼치지만 지도 자체에는 아무 목적지가 없다. 저마다 목적지는 다르며 또한 그건 고정된 것도 아니다. 내가 가야 하는 길 주변에 펼쳐진 풍광이 누구에겐 그토록 절실한 목적지일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의 목적지로 이어진 수만 갈래 여정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지도를 본다는 것은 목적지로 정신 없이 내처 달리기 위한 게 아니다. 무관한 듯 보이는 주변 풍광과 그 사이로 난 숱한 길이 나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며, 가야 할 나의 길을 한데 엮고 이어주는 고리임을 깨닫는 일이다. 혹시 아는가? 그렇게 지도를 본다면 내가 더 나은 목적지를 찾아 더 나은 길을 딛게 될지 아니면, 지금 내가 향하는 그곳과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 대한 더 굳은 믿음을 갖게 될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을 앞에서 끌며 썼던 너무도 장중한 문장, 내겐 지도와 이정표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




“별 총총한 하늘이 세상 모든 길의 지도며, 별빛이 하나하나의 길을 비추던 시절은 복되었으리라.”

1.  “It was all those people in the cars coming the other way (…) The first one looked so sad. And then the next one looked exactly the same way, and then the next one and the next one, they were all the same.” (9)


2.“I’m happy to be riding back into this country. It is a kind of nowhere, famous for nothing at all and has an appeal because of just that.” (3)


3.“If the line wiggles, that’s good. That means hills. If it appears to be the main route from a town to a city, that’s bad. The best ones always connect nowhere with nowher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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