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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 볼펜


나 처음 태어났을 때 두 자루 연필보다 작았지만 이내 젓가락 다음으로 볼펜하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로 Mon Ami 즉 나의 친구라는 뜻의 몽아미를 연음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주로 썼던 모나미 볼펜은 지금에 보아도 디자인이 참 건조하고 간단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미적분을 풀 때 더러 볼펜똥이 귀엽게 묻어나오기도 했던 필기구입니다. 아, 최고최저값을 구하는 문제에서 날렵한 이차함수 그래프를 그리다 말고 똥종이로 만든 연습장의 스프링 근처에 볼펜의 향긋한 똥을 찍어 바를 때, 내가 세상의 중요한 일을 지금 하고 있구나, 내가 지금 인생의 한 경삿길을 넘어가고 있구나, 퍽 가소로운 궁리를 하기도 했던가요.

그땐 군사훈련이 교련이란 퍽 우아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정규과목으로 편성된 시절. 교무실에는 군복 차림의 교련 선생이 있었고, 우리는 각반을 차고, 얼룩덜룩 무당개구리 피부 같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기도 했습니다. 공을 차고 뛰놀던 운동장에서 나무로 만든 M16 소총으로 기합을 넣으며 총검술을 연마하기도 했었죠. 학교에서 군사훈련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철이 몹시 없던 우리들은 그때 금쪽같은 10분의 쉬는 시간에 소총을 분해-조립하듯 모나미 볼펜을 가지고 노는 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티나 크래커 한 봉지를 걸고 내기를 한 것입니다. 자코메티의 홀쪽한 조각 같은 볼펜은 의외로 나름 복잡하고 정교했습니다. 몸통, 앞뚜껑, 볼펜심, 스프링, 그리고 똑딱이 걸쇠. 아래의 나사는 그런대로 쉽게 풀리지만 뚜껑처럼 달린 똑딱이를 분리하자면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손끝의 미세한 감각을 동원하는 자에게 결국 승리는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모나미 볼펜은 있는데 티나 크래커는 아무리 찾아도 없더군요.

한 사람의 일생이란 필기구를 통해서 정리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옛날 책보 메고 다니던 초등학교 땐 연필, 중학교 땐 만년필, 고등학교엔 볼펜 그리고 대학교에서는 각종 볼펜들. 사회에 나와선 고급 볼펜과 만년필. 그들이 실어나른 각종 문서와 임명장과 사업과 일기와 사령장과 광고지의 낙서와 영수증의 사인들. 필기구와 함께 했던 날들이 그립습니다. 전기 충격처럼 혓바닥을 따끔따끔 찌르던 연필의 흑연, 손가락 지문을 파고들던 만년필의 잉크, 끈적끈적한 볼펜똥은 물론.

어디 여행 가서 침대에 누워 떠오른 생각을 메모지에 휘갈기다 보면 어느 순간 글씨가 희미해지다가 문득 길이 끊기게 됩니다. 볼펜심에도 여지없이 중력은 작용하는 것이라 볼펜액이 그 무거움을 거슬러 나오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볼펜, 생각만 있으면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사소한 볼펜 끝에도 중력은 작용하고 그래야 글씨는 온전히 태어납니다. 보잘것없는 볼펜이 아니라 참 엄숙한 필기구입니다.

퇴계는 이승에서의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저 매화에 물 좀 줘라,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제 슬슬 더러 나의 최고최저값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나는 미처 다 닳게 하지 못한 등산화, 아직도 내 생각을 받아적을 태세로 긴장하고 있는 저 볼펜들에 대해 궁리해 봅니다. 나에게도 마지막 날은 분명 올 테고, 그때 무슨 말을 할까요. 모나미 볼펜도 하나 같이 묻어다오!

모나미 볼펜. 마침 눈앞에 띄길래 이런 객적은 소리 한마디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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