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은 바람 따라 돌아다니는 가랑잎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낙엽을 타고 노는 개미들도 저의 집은 낙엽을 배출한 나무 기둥의 저 아래 뿌리 근처에 마련한다. 멀미는 바다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단단한 땅에서도 어지러움은 얼마든지 생기고 지진은 끊임없이 지표면을 울린다.
그러니 건물은 한곳에 단단히 닻을 내려야 한다. 집은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야 한다. 흙이란 한없이 단단하기도 하지만 또한 한량없이 부드럽기도 한 물질이다. 그 건물이란 태풍과 지진은 물론 거주자들의 뚱뚱한 무게와 사무실의 중량을 감당해야 하는 것. 이를 위해서 어디에 힘을 고정해야 할까. 말하자면 건물을 올리기 위해 기둥을 세우듯 기둥의 기둥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무거움의 집합인 건물을 지상에 단단히 고정하는 기초공사의 기법은 한 가지만은 아니다. 팽이기초라는 것이 있다. 이는 팽이 모양의 콘크리트 블록을 만든 뒤 뗏목처럼 연결해서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뗏목이 사나운 물결에서도 뒤집히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듯 그렇게 기초를 세운 뒤 건물을 올리는 것이다. 대규모의 빌딩에는 적용할 수가 없으나 소규모의 건물에는 안전성이 확보된 기법이라고 한다. 이 팽이기법은 공사비용과 공사기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장점이 있다.
한편 가장 일반적인 그래서 가장 널리 이용되는 것은 이른바 파일을 땅에 박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철근과 콘크리드 파일(기둥)을 지하의 암반에까지 닿게 하여 고정시키는 것이다. 우리 몸에 살 아래 뼈가 있듯 지구도 흙을 파 내려가면 딱딱한 암반이 나온다. 이 암반에 기둥을 고정시켜야 힘을 받는 것이다. 이는 지형과 지질에 따라 깊이도 다 다르고 공사 여건이 다를 수밖에 없다. 통상 최소한 15미터 이상의 파일을 박아야 하니 공사장비도 저렇게 요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리도 둘을 놓고 검토해 보았지만 안전을 택하는 쪽으로 기울어 파일 공사를 진행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제 그에 따라 우선 파일을 때려 박을 크레인과 부속 장비들이 속속 도착해서 그 작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벌판에 몇 사람이 분주했다. 한눈에 보아도 노련한 티가 나는 전문가들이 복장을 재대로 갖추고 뛰어다녔다. 모내기가 끝난 부지. 이제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울 준비가 본격 시작된 것이었다.
엎드린 대지 위에 낯선 물건들이 즐비했다. 육중한 크레인이 진을 치고 작은 포클레인이 두 대. 대포처럼 긴 오그(auger)드릴, 케이싱(casing), 리더(reader) 등이었다.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 보였다. 한쪽에서는 파일과 함께 투입해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시멘트 밀크(cement milk)를 반죽할 믹서(mixer)기가 자리잡았다.
호스가 이리저리 뒹굴고, 한쪽에서는 파란 불꽃을 튀기며 용접을 하고, 육중한 철판을 깔아 크레인을 이동시키고, 한 트럭분의 자갈을 깔아 질컥이는 운동장을 정리하고, 동력실에서 스위치를 올리면 어느 구멍에서는 시꺼먼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포크레인의 몸 끝에 달린 물음표같이 생긴 집게가 내려와 줄을 걸어 하나씩 순서에 따라 조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포크레인에서 우뚝한 사대가 마련되고 리더, 케이싱, 오그 드릴이 장착되고 주문했던 15미터짜리 파일이 와서 땅에 박으면 된다.
땅을 파려는 장비가 점점 하늘로 그 높이를 뻗어갔다. 이윽고 기본 준비가 되었는가 보다.특이한 복장의 사람들이 펜스 곁의 후미진 곳에 발전기에 모여 있더니 포크레인 쪽으로 일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총신을 하늘로 두고 우뚝 서기 시작하는 포크레인. 마치 우주선에 탑승하기 전에 발사대에 소변을 눈다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 일행을 퍼뜩 떠오르게 하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이제 곧 땅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척 보면 땅 아래를 아시겠군요.
---대강 느낌이야 오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땅의 마음이지요.
---하늘 아래보다도 땅 아래가 더 변화무쌍한 것 같지요.
콘테이너 앞에서 마침 곁에 있던 시공회사 사장님과 나눈 대화이다. 건축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나의 눈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느낌도 안목도 아직은 생겨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 방면으로 도가 튼 사장님은 이미 많은 경험이 퇴적되었음에도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스쳐들은 바로는 오늘 이렇게 조립을 하고 내일 시공타를 한다고 했다.
궁리 부지에는 총 51개의 파일을 박는다. 그중 2개의 시공타를 해서 암반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또 땅 아래의 지질의 상황을 파악한다고 했다. 만약 물이 나오거나 모래층이 많으면 15미터 파일로는 안 되고 23미터 가량을 더 내려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골치 아픈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파주출판도시의 지질은 갯벌에 퇴적된 땅이라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벌써 준공한 이웃인 <세화출판>은 다행이 15미터에서 공사가 끝났는데, 또 그 이웃인 <아르디움>은 23미터를 팠다고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지하 3층을 팠는데 지하우물이라고 할 만큼 많은 물이 나왔다고 한다.
지하는 울퉁불퉁해서 한 발짝의 차이에서도 그만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가 보다. 내일이면 땅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어느덧 날은 저물었고 포크레인의 포신이 겨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각달이 떴는가.
조각달이 낮게 뜬 이슥한 밤. 한 사내와 한 여인이 으슥한 골목에서 만나고 있다. 사내는 초롱불을 들고 고이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할 듯하다. 여인은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사내의 은근한 눈빛을 슬쩍 외면하고 있다. 그 유명한 신윤복의 <월하정인도>이다. 두 연인이 밀회하는 현장인 담벼락에는 이런 제시(題詩)가 붙어 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
달빛 침침한 늦은 밤 두 사람 마음이야 두 사람만 알겠지.
늘 그저 딛고 다닐 줄만 알았지 땅 아래에까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내. 그 사내는 오늘밤 땅의 마음을 알려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부쩍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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