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북한산 비봉. 2020. 7. 4. ⓒ 이굴기
***** 반지름의 효과
코로나 여파로 버스마다
빈자리가 많다
다음은 동묘동묘 정류장입니다, 안내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드를 찍는데
오늘의 목적지인 동묘 풍물시장 입구보다
훨씬 떨어진 곳까지 버스가 미끄러진다
앉아서 창밖을 볼 때와
서서 보려니 훨씬 멀게 느껴지는 듯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여러 그루 뒤로 가는 건 마음이 서두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에서 땅으로 내리니
실은 생각만큼 그리 멀리 떨어진 건 아니었다
둥근 지구의 한 표면을 달리는 버스에서
서고, 앉고, 내린 곳마다
그 반지름이 각각 달라서 벌어지는
현상이겠다
나중 더 밑으로 내려가
반지름이 아주아주 짧아진
옴방한 공간에 몸을 뉜다면
모든 거리가 그 거리
그 자리가 제자리인 줄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인가
- 보유.
동묘에 가끔 간다. 일요일, 산에 가지 않으면 동묘라도 간다. 휴일의 동묘는 대학보다 낫다. 지지난주 종로3에서 환승해서 동대문 지나고, “다음 내리실 정류장은 동묘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창 바깥으로 동묘 거리를 보니 출렁출렁 각종 좌판마다 골동품을 구경하고 흥정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면서 동묘 입구를 보는데 좀 이상했다. 버스가 내가 목표한 지점에서 한참이나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이렇게나 멀어질 줄 알았다면 전 정류장에서 내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주선에서 한 발짝 달에 착륙하는 것처럼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일단 버스에서 내려섰다.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니건만 버스정류장에서 동묘 입구를 어림해 보니 버스 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만큼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지구를 완벽한 구로 가정하자. 적도를 따라서 지구 한 바퀴, 즉 지구 둘레를 L이라 하자. L에 10미터를 붙여 L+10m의 길이의 줄로 조금 길게 늘인 뒤, 다시 지구 적도를 감싼다면 조금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질 것이다. 겨우 10미터 늘어난 둘레의 차이임에도 그 틈으로 자동차가 씽씽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보통 생각할 때 '지구 둘레는 이미 엄청나게 큰 수니까, 줄을 10m 정도만 더 길게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식을 세워서 검증해보면, 전체 줄 길이가 늘어날 때 틈은 정확히 그 늘어난 길이 만큼을 둘레로 가지는 원의 반지름으로 주어진다. 비록 그 증가폭이 처음 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지만, '절대적으로' 는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 궁리해 보면, 버스는 둥근 지구의 한 지점을 달리는 중인 바, 그 안에서 내가 취하는 동작에 따라서 지구 중심으로부터의 반지름은 각각 달라진다. 서서 있을 때, 자리에 앉을 때, 땅에 내려설 때, 그리고 나중에나중에 내가 지하에 한 방을 얻어 무덤으로 더 깊숙이 내려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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