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월 1만 5천원에 집 앞에 신문이 배달된다는 사실에 늘 행복해 하곤 한다. 최근 들어 신문에 ‘인문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 없다. 과학자도 경영자도 정치가도 ‘인문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인문학의 연구 대상이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견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왜 인문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개는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포장한다. 또는 인문학의 무목적성에 대해 얘기하기도 한다. 내 경우 (나도 인문학을 하는 선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내가 즐겁지 않은 자리는 돈이 된다 해도 마다하고, 내가 즐겁다면 고료 없는 원고라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쓴다. 그것이 바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은” 경지가 아닐까?


나는 인문학의 정수는 음악에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말로 하지 못하는 많은 것을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올 들어 몇몇 강의를 통해 인문학과 음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수강생들로부터 난해한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음악으로부터 그 오묘한 진리에 다가간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단테의 『신곡』,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플라톤의 『향연』이 그간의 강의 주제였다. 하나씩 그 매듭을 풀어본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성직자로, 그가 40대 초반에 쓴 『고백록』은 자신의 종교적인 각성과 인간적인 번뇌를 솔직담백하게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자서전’(autobiography)을 찾으면 그 효시로 꼽는 책이 바로 『고백록』이기도 하다. 이 책과 음악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자서전’과 ‘고백’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언급한 위키피디아의 자서전 항목을 조금 내려오면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가 내린 자서전의 정의를 만날 수 있다.


“누구든지 뛰어난 일이나 그에 상응한 일을 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기 손으로 자기 삶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마흔 살을 넘기기 전에 그런 작업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첼리니는 자신이 언급한 나이 즈음에 역시 자서전을 썼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선례를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또한 스스로의 방탕했던 시절이나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았던 행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적었다. 예술가가 쓴 자신의 삶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성을 갖는 첼리니의 자서전은 뒷날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괴테는 직접 첼리니의 책을 독일말로 번역하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유명하게 되는 자신의 자서전 『시와 진실』을 썼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는 괴테의 작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추종자였다. 그 또한 첼리니와 괴테에 이어 스스로 자서전(최근에 그 전반부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을 썼고 첼리니의 삶을 토대로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를 작곡했다. 베를리오즈의 극작품들은 최고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추측컨대 고국 프랑스에서 당대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20세기 후반에야 정당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페라로부터 파생된 <로마의 카니발>이라는 서곡도 유명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강의하는 자리에서 함께 듣기에 더없이 적합한 주인공의 아리아가 있다. 그야말로 절절한 삶의 고백이요, 근대에 들어 아티스트라는 존재를 기술자로부터 예술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선언과도 같은 노래이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거친 골짜기에서 왜 나는 평범한 양치기가 되지 못했을까 그랬으면 들판에서 들판으로 날마다 정처 없는 가축을 돌보았을 것을 자유와 고독, 고요함 속에 고된 노역도 없이 마을의 소란을 멀리하고 종달새처럼 노래했을 텐데 그러면 밤마다 내 오두막에 바닥을 침대 삼아 홀로 누워 평온하게 잠들었겠지 어머니의 품속처럼 이 거친 골짜기에서 왜 나는 평범한 양치기가 되지 못했을까 그랬으면 들판에서 들판으로 날마다 정처 없는 가축을 돌보았을 것을 자유와 고독, 고요함 속에 종달새처럼 노래했을 텐데 자유와 고요함 속에 고독과 고요함 속에


자유와 고요함 속에 고독을 무릅쓴 목자(牧者)에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고뇌를 감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빗대는 무엄한 시도가 아닌가! 위의 동영상 가운데 1분부터 2분 사이에 나오는 것이 바로 위의 노래를 부르며 고뇌 속에 작업했던 첼리니의 역작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이다. 첼리니가 자서전을 통해 정립한 근대적인 예술가상이 괴테의 재발견을 거쳐 베를리오즈의 음악으로 꽃을 피우기까지 300여년이 걸린 셈이다. 예술가가 주인공이 되는 예술작품이야말로 해당 장르의 백미이다. 베를리오즈의 작업은 20세기에 가서 한스 피츠너와 파울 힌데미트라는 작곡가에 의해 한층 무르익는다(이에 대해서는 졸저 『이젠하임 가는 길』에 장황하게 설파한 바 있다).


한숨 돌려 고백이라는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모차르트의 노래만큼 마음을 위로하는 선율이 없지 않을까? <고해자의 엄숙한 저녁 기도>(K339) 가운데 ‘라우다테 도미눔’.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했을 고해처럼 들린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그분의 사랑 우리 위에 굳건하고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