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날 돼지처럼 - 건축 일기 2


1


대강 눈짐작으로 궁리의 필지를 가늠해보았지 실제로 그 위치를 확인한 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늘 아래 궁리의 땅이 네 군데 점을 찍으면서 명확해졌다. 지적공사 직원들은 그 지점에 플라스틱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눈에 쉽게 띄도록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 색깔은 보라색을 띈 붉은색이었다.


이제껏 방치된 땅이었다. 구청의 서류 속에서는 지번이 매겨지고 임자가 가려지지만 하늘 아래에서는 딱히 누가 주인이랄 것도 없다. 그저 차지하고 누리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 속속들이 땅 아래의 사정이야 짐작조차 못하지만 그간 누대에 걸쳐 한해살이풀들이 얽히고설키며 살아왔다.


쑥, 달맞이꽃, 쑥부쟁이, 질경이, 돼지풀 등등 대부분의 식물들은 겨울이 오면 지상부는 모두 말라 없어진다. 여러해살이풀들은 뿌리만 남아 겨울잠을 자고 이듬해 그 자리에 다시 살림을 차린다. 자신의 몸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지난 날 무성했던 날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물기와 빛깔을 모두 잃고 사라지는 풀들.


작업장의 인부들이 나서서 이제는 그 풀을 걷어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큰 뇌수술의 경우 먼저 머리카락부터 잘라야 한다. 속세를 떠나면서 처음 하는 일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일이다. 어수선하게 인체의 뚜껑처럼 달려 있는 그것을 제거하면서 우리는 모종의 의미심장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이곳의 풀들은 봄이 다시 와도 이곳에서는 피어나지 못할 것이다.


2.


겨울철, 시골의 잔칫날. 그날은 날씨도 달라졌다. 날씨가 달라지는 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양간에는 짚도 새로 깔아주었다. 그날은 쇠죽도 특별식으로 끓여주었다. 아침부터 곳곳에서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굴뚝은 물론 사람들의 입과 코에서도 더운 김이 설설 기어 나왔다. 차양을 치고 마당에 둥구리 장작불을 피웠다. 물이 설설 끓는 가운데 미리 선택된 돼지가 리어카에 실려왔다.


돼지는 시커먼 고무줄에 칭칭 묶여 있었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았던 돼지. 먹을 것이 땅에 떨어져 있었기에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고개는 두껍고 등은 산등성처럼 뾰쪽해서 누울 수 없었던 돼지. 이제 그곳으로 가는가. 리어카에 묶이고 처음 본 하늘. 그 하늘이 무서운 곳이었나. 돼지는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이윽고 돼지의 간지러운 목에 칼이 푹 들어갔다.


목에 뚫린 구멍으로 콸, 콸, 콸. 쏟아지는 피. 드높아지는 돼지의 울음소리. 그 소리는 목구멍으로도 새어나왔다. 붉은 피는 붉은 고무대야에 받았다. 돼지 피를 모두 뽑아내야 돼지고기가 맛있다고 했다. 피가 잘 나오지 않으면 구멍에 꽂힌 칼을 십자 방향으로 한 번 더 그었다. 더욱 높아지는 돼지 울음소리. 그리고 리어카를 기울이면 피는 깔끔하게 잘 나왔다.


그렇게 피를 다 쏟아 내고 울음소리도 모조리 토해 내면서 돼지는 고기로 변했다. 이제 펄펄 끓는 물을 끼얹으며 시꺼먼 돼지털을 뽑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고무대야 속에서 주인 잃은 피가 응고하는 가운데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그 소란 속에서도 국수는 잘 삶겼다. 찬물에 담갔다가 동그랗게 한 뭉텅이씩 차곡차곡 챙 넓은 소쿠리에 쟁여졌다. 멸치 국물에 별다른 고명을 얹지 않아도 흰 국수는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돼지의 울음소리와 사람들 웃음소리가 뒤섞인 겨울철, 시골 잔칫날.


--- 졸저, <오십의 발견>에서 인용함.




3.


이 신성한 땅을 두고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이제 궁리가 들어설 넓은 대지를 내 발로 딛고 확인하는 데, 시골 잔칫날의 돼지 생각이 났다.


지적표시를 하는 말뚝이 어떻게 보면 누가 땅에 흘린 한 방울의 피 같았던 것. 어쩌면 돼지 엉덩이에 찍힌 등급표시 도장 같기도 했던 것. 인부들이 나서 그동안 방치되었던 풀들을 풀풀 제거하는 것. 이는 어쩌면 그리도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돼지털을 뽑는 일과 꼭 같았던 것.


오고가는 날들 속에 큰일 하나가 이루어진다. 그토록 완강하던 땅이 삽과 포클레인에 마음을 열어주고 건물 하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런 준비를 하는 경기도 파주시 서패동 471-5번지는 잔칫날의 앞마당처럼 슬슬 기운이 들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