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후계자
자코모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교회 음악에 종사했던 가풍에서 자란 푸치니도 루카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열여덟 살 나던 1876년 피사에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난 뒤 오페라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바치니와 폰키엘리에게 배운 그는 1884년 하이네와 고티에의 원작에 붙인 첫 오페라 <빌리>, 1889년 알프레드 드 뮈세 원작에 따른 <에드가르>를 작곡했지만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다만 푸치니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리코르디 출판사가 계속 그를 후원했다.
푸치니에게 성공을 안겨준 것은 1893년에 발표한 <마농 레스코>였다. 프랑스 작가 아베 프레보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오페라는 푸치니에 4년 앞서 마스네도 <마농>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만들었을 만큼 매력적인 소재였다. 베르디 최후의 작품 <팔스타프>가 초연되기 1주일 앞서 토리노에서 공연된 <마농 레스코>는 전 유럽과 바다 건너 미국, 멕시코에 푸치니라는 이름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동년배의 가운데 베르디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우뚝 선 푸치니는 고향 근처에 자리 잡고 일련의 걸작을 쏟아낸다. 1896년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라 보엠>이 초연되었고, 4년 뒤에는 일찍이 1889년 사라 베르나르의 연기로 처음 봤을 때부터 작곡하고 싶었던 사르두의 연극 <토스카>를 마침내 오페라로 만들었다. 푸치니의 참신한 화성과 대담한 어법은 청중의 심금을 울렸다. 불세출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수많은 히로인으로 오페라 팬들의 뇌리에 각인되었지만, 그 가운데 단 한 역할을 뽑으라면 단연 토스카를 들 수 있는 것도 이 작품이 푸치니의 오페라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상을 대변한다.
20세기 접어든 푸치니에게 전과 전혀 다른 감성의 작품이 다가왔다. 런던 여행 중에 발견한 <나비부인>의 이야기는 1904년 밀라노 초연에서는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새롭게 손보아 석 달 뒤 브레시아에서 공연해 실패를 만회했다. 이국적인 소재에 대한 푸치니의 관심은 <서부의 아가씨>(1910)로 옮아갔다.
푸치니에게 닥친 개인적인 시련은 만년의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아내 엘비라는 근거 없이 남편과 하녀가 바람을 피웠다며 추궁했고, 하녀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세간의 시선은 푸치니에게 곱지 않았고, 특히 프랑스에서 그는 큰 비난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제비>(1917년 몬테카를로) 그리고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로 이루어진 ‘일 트리티코, 3부작’(1918년 뉴욕)을 발표하면서 독창적인 감각을 심화했다.
특히 단테의 『신곡』으로부터 소재를 가져온 <잔니 스키키>는 푸치니를 옛 전통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만년의 베르디가 <팔스타프>를 통해서, 그리고 볼프 페라리가 카를로 골도니의 희곡을 통해서 과거로 돌아갔던 것과 일맥상통했다. 마침내 푸치니는 최후의 작품 <투란도트>와 더불어 18세기 ‘코메디아 델라르테’ 작가 카를로 고치의 원작을 되살려냈다. 푸치니는 사랑을 통해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에 도달하려고 했던 이 작품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푸치니는 1924년 후두 수술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토스카니니의 노력을 통해 <투란도트>는 청중에게 소개되었고, 대가의 삶에 월계관을 드리웠다.
푸치니가 등장한 19세기 후반은 베르디와 바그너로 대변되었던 낭만주의 오페라가 정점을 찍고 새로운 동력을 찾던 시기였다. 이때 제 역할을 한 것이 ‘베리스모’ 오페라였다. 문학의 ‘리얼리즘’을 뜻하는 베리스모는 바그너의 숭고한 영웅 전설과 베르디의 엘리트주의적인 고전(古典)의 무게에 치인 청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와 루치에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1892)로 대표되는 베리스모 오페라는 한 마디로 ‘민초(民草)들의 삶의 단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당대 푸치니의 지지자들도 반대자들도 모두 그가 이와 같은 베리스모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기교적인 성악과 복잡한 이야기 전개를 배제하는 간결한 그의 스타일은 베리스모 작곡가들과 닮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치우침은 푸치니의 균형감과는 거리가 있다. 푸치니도 비현실적이지 않은 개연성 있는 소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등장인물 내면의 갈등을 과장하지 않고 극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이라면 그것이 고대 중국이거나 바다 건너 미국의 이야기라도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푸치니는 프랑스의 마스네가 도달한 ‘서정미’와 이탈리아의 베르디가 확보한 ‘선율’, 독일의 바그너에서 정점에 도달한 ‘드라마’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 안에 녹여냈다. 그런 점에서 푸치니는 오페라 예술이 20세기 들어 영화에 종합예술 창작의 열쇠를 넘겨주기 이전에 등장한 마지막 거장이었다.
푸치니의 혁신
베르디와 바그너의 긴 그림자는 20세기에도 계속해서 드리워, 푸치니는 그들에 비해 가볍고 얄팍한 작곡가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러나 이는 푸치니를 피상적으로 감상한 결과 그 깊은 밑바닥에 흐르는 진면목을 보지 못한 탓이다. 일찍이 바그너와 베르디 해석의 일인자였던 토스카니니가 당대의 선배 푸치니를 그토록 존경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포레와 뒤카, 드뷔시와 같은 프랑스의 대가들이 이탈리아의 맞수에 대해 경계와 조롱을 보낸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계에 서서 새로운 조류에 한껏 개방적인 구스타프 말러와 모리스 라벨은 푸치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말러는 푸치니의 신작을 유럽과 신대륙에서 주저 없이 소개한 선구자였다.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교향곡 작곡가 말러와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를 이어주는 공감대는 바그너의 관현악에 대한 두 사람의 이해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푸치니의 유려한 성악 멜로디에 취해 그 밑을 받치는 오케스트라 화성의 눈부신 표현 효과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반음계적인 무한선율에 얹은 그의 아름다운 성악이야말로 바그너와 베르디를 결합시킨 탁월한 업적이었다. 또 베리스모 작곡가들처럼 단순하고 자극적인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첨예한 심리를 섬세한 뉘앙스로 담아낸 것도 말러와 토스카니니가 옛 거장들에 비해 뒤지지 않은 거장으로 푸치니의 손을 치켜든 까닭이다.
특히 <토스카>는 푸치니의 작품 가운데 바그너의 흔적이 가장 역력한 오페라이다. 작곡가는 여기서 ‘라이트모티프’를 적극 사용한다. 악역인 스카르피아의 어두운 욕망을 대변하는 선율이 극 전체를 지배하고, 토스카와 카바라도시, 그리고 쫒기는 안젤로티가 각자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토스카>는 앞뒤로 발표된 <라 보엠>, <나비부인>과 함께 말러가 즐겨 지휘한 오페라이다. 비롯된 팽팽한 극적 긴장감을 음악으로 끌고 가는 실력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와 더불어 실제 역사적인 배경을 다룬 작품의 백미다.
<투란도트>가 오페라 세리아 역사의 대단원을 내린 작품이라면 <잔니 스키키>는 오페라 부파의 계보에 마침표를 찍은 오페라다. 푸치니는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로 시작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그리고 베르디의 <팔스타프>로 이어지는 코믹 오페라의 흐름에 <잔니 스키키>를 더함으로써 ‘화룡점정’을 찍었다.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사랑을 하는 남녀의 절절함이 푸치니의 절묘한 음악의 힘으로 뜻을 이루는 모습은 보는 이를 더없이 흐뭇하게 한다.
ⓒ 정준호. 2013. 05. 23
베리스모와 푸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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