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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말하길, 침묵 가운데 소리가 있으라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대중매체를 통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주문을 걸어왔다. 우리는 작게는 방송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부터, 상업광고의 효과음악으로, 마지막으로 바그너 자신의 곡과 그의 세례를 받은 후예들의 영화음악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바그너의 음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유구한 역사와 전통, 둘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끝으로 기름 부어진 자의 사명이다. 이 세 가지 주제로 바그너 사운드의 이야기를 풀어가본다.


바그너 사운드 1: 유구한 역사와 전통


제약회사나 건설회사가 광고를 만든다고 치자. 이들은 자신들의 약(藥)이나 건물이 오랜 전통과 정직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곧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그너 오페라만큼 알맞은 음악은 없다. 바그너의 소재는 언제나 역사와 전통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선악의 피안(Jenseits von Gut und Böse)』에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가리켜 지난 200년 동안의 독일음악을 전제로 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음악 자체가 하나의 역사의 완성이며 그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작품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약이, 또는 건물이 장구한 전통의 산물이며 그 하나로 오랜 세월을 함축하고 있다고 얘기할 의도라면 이보다 적합한 음악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보아온 광고는 썩 잘 만든 것이었다.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가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독특한 오케스트라 피트가 신비로운 음향의 비결이다.



바그너는 이런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고안을 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하기 위해 건설한 바이로이트(Bayreuth) 극장의 음향 구조가 그 본보기다. 바그너는 성악가들이 노래하고 연기하는 무대 아래를 움푹하게 파서 그 안에 오케스트라가 들어가게 했다. 동굴과 같이 무대 밑으로 파고 들어간 오케스트라는 성악가를 압도하지 않고 목소리에 절묘하게 스며들었고, 먼 곳으로부터 아스라이 전해오는 신비로운 음향을 내는 데 적합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 이래 무대와 음악의 결합이 빚은 결정체로 오늘날 우리가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운드트랙’의 효시다.


예전의 작곡가들이 시를 돋보이게 하고 노래를 반주하기 위해 기악을 사용했다면, 바그너는 관현악으로 성악가에게 완벽한 세상을 창조해주었다. 그의 구불구불한 현악은 유장하게 흐르는 라인 강물이 되고[<라인의 황금(Das Rhinegold)>], 찬란한 금관은 태양을 눈비시게 반사하는 옛 성채로 안내하며[<탄호이저(Tannhäuser)>], 음산한 튜바와 베이스의 저음은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을 무대 위로 끌어다놓는다[<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 오케스트라는 용기를 부추기고, 감지할 수 없는 미묘한 템포 변화로 심리학의 가장 복잡한 이론을 완성한다.


바그너의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20세기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평생 동안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Lohengrin)>을 들을 때마다 십대에 고향 뤼베크(Lübeck)에서 보았던 오페라 무대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고백이야말로 바그너의 역사성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완성한 실례다. 그에게는 자글거리는 모노럴 음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트럼펫의 팡파르, 그에 이은 혼례의 합창, 또한 백조 기사의 자기소개가 그 어떤 명망가의 장황한 내력보다 황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바그너가 만든 낭만주의의 극치다.


바그너에 대해 얘기하는 토마스 만. 뒤로 로엔그린의 제1막 전주곡이 흐른다.



바그너 사운드 2: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자신의 음악으로 대자연과 도시, 웅장한 건축물을 만든 바그너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있었다. 그 인공과 자연을 빛과 어둠의 적절한 비율로 조합해 인간을 도취시킬 사물의 원액을 농축해 영혼을 지배할 향수를 만들 듯이 바그너의 배합은 정교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야말로 그 핵심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곧 사랑과 죽음이라는 낭만주의의 핵심 가치를 완벽히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묘약’이다. 서로 마시고 쳐다보면 죽음도 두렵지 않을 사랑에 빠진다는 묘약, 과연 그런 것이 있긴 한가? 물론 없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약이 있다면 누군가 엄청난 돈을 벌고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사랑의 묘약이 없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 아니다. 굳이 묘약 없이도 어차피 사람은 피할 수 없는, 또는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곤 한다.


때문에 흔히 생각하듯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불륜을 무릅쓸 용기를 얻은 것은 묘약 덕이 아니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사약임을 짐작하고도 받아 마시는 모습에 더 참지 못한다. “나 때문에 죽으려 하다니!” 트리스탄도 마찬가지다. “내 뒤를 따르려 하다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묘약이 아닌 맹물이었더라도 이들이 그것을 죽음에 이르는 약으로 알았더라면 결과는 같다. 바그너가 밤과 낮을 뒤섞어 만든 관현악의 묘약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들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고, 한번 도취되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가는 주인공과 사물, 심지어 사건 하나하나에 음악으로 된 ‘동기’를 부여하고, 이를 ‘라이트모티프(Leitmotiv)’라고 불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각각의 동기가 있고, 두 사람이 어우러질 때 그 동기들은 ‘사랑’이 된다. 오늘날 이런 방식은 삼류 TV 드라마에서도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바그너는 침묵에서 소리를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소리마다 고유의 무게를 배분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이 생기게 만들었다. 소리가 소리 주위를 돌아 에너지를 만들고 그 기운이 드라마를 끌어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그너가 베토벤으로부터 배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바그너 사운드의 본질이다. 20세기의 숱한 사운드트랙은 바그너가 발명한 이 묘약을 나눠 쓰는 데 정신이 없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배경으로 쓴 라르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


바그너 사운드 3: 기름 부어진 자의 사명


오페라는 태생이 세속적인 예술 장르다. 속된 무대에 신성한 종교는 소재가 될 수 없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호걸의 이야기나, 옛 전설과 민담, 당대의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부활이야말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였지만, 그것을 오페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공공연한 금기였다. 바그너는 우회적으로 금기에 도전한다. 그는 게르만 신화 속에서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영웅을 가져왔다. 이 영웅은 날 때부터 남다른 모험을 할 운명이다.


그 모험이란 신들이 자초한 세계의 몰락을 구하는 것[<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일 수도 있고, 생전 노래해본 적이 없는 귀족 청년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기 위해 노래 경연에 출전해야 하는 경우(<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도 있다. 그 모험의 절정은 잃어버린 성배(Holy Grail)를 찾는 기사의 이야기, <파르지팔(Parsifal)>이다. 바그너는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에 ‘무대신성축전극(ein Bühnenweihfestspiel)’이라는 성격을 부여했다. 성스러운 것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뜻에서 그는 바이로이트 밖에서는 이 오페라를 공연하지 말라는 유언도 남겼을 정도다.


<파르지팔>에서 오케스트라는 실로 엄청난 역할을 해야 한다. 기사장 구르네만츠는 성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파르지팔을 자신들의 전당으로 데려간다. 이때 ‘전환의 음악’이라는 것이 연주된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이른 것에 놀라는 파르지팔에게 구르네만츠는 “여기는 시간이 곧 공간인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오케스트라는 극장을 사차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자신이 지탱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을 번쩍 들어서 언제나 있어 왔던 역사의 한 지점으로 옮겨놓는 작업이다. 이는 오케스트라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기적을 믿지 않고는 이룰 수가 없다.



<파르지팔> 제3막의 전환 음악: 시간이 곧 공간인 곳으로 이동한다.



살펴본 것처럼 바그너는 스스로 역사의 흐름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모티프들을 충돌시켜 에너지를 만들었으며, 결국 그 에너지를 영원한 진리(종교)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세 가지 구상은 사실 독일 음악의 역사를 정리했고, 숱한 사랑의 개인사를 써왔으며, 스스로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란 바그너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새로운 문명의 건설, 그것이 바그너 사운드를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 정준호. 2013.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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