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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심포니 - 시카고를 처음 가다


음악은 모든 문화 가운데 가장 늦게 꽃을 피운다. 문학이 상상하고 미술이 보여주고 건축이 마당을 만든 뒤에야 비로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때문에 음악은 옛 시대를 회고하는 황혼이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여명이기도 하다. ‘여명’과 ‘황혼’을 서양에서 한 단어(twilight)로 쓰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그 도시의 음악은 과거를 담고 있고 당대의 수준을 보여주며 미래를 전망한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고 왔다.


나는 아직 시카고를 가본 적이 없다. 나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여러 가지 인상으로 그려볼 뿐이다. 당연히 그런 인상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영화이다. 금주령이 발효 중인 1920년대에 알 카포네의 세상이었던 도시가 시카고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이 아마도 옛 시카고를 떠올리는 시발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피아의 이미지는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통해 이어진다. ‘고담’이라는 가상의 도시가 있고, 그 중심에 ‘웨인타워’(시카고 보드 오브 트레이드 빌딩이다)가 우뚝하며, 악당 중의 악당 조커가 활개를 치고 박쥐 영웅이 유일한 희망의 상징이다.


마피아 다음으로 시카고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는 소방관이다. 영화 <분노의 역류>는 불과 싸우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각인시켰다. 음악 애호가인 나로서는 영화 속 순직 소방관의 시가행렬에서, 일찍이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뉴욕의 마천루 창에서 내려다보았다는 똑같은 소방관 장례행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분노의 역류> 가운데 장례 행렬



시카고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이들이 성인으로 모시는 성 패트릭을 기념하는 축일은 유명하다. 매년 3월 17일 시카고 강물은 녹색으로 물들고, 사람들은 녹색 옷과 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한다. 해리슨 포드는 영화 <도망자>에서 초록 군중 틈에 숨어 연방 보안관 토미 리 존스의 추격을 벗어난다.


이제 음악 얘기를 좀 해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국운은 만개했고, 오케스트라는 도시의 꽃이었다. 헝가리 지휘자들이 특히 돋보였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유진 오먼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셸, 미니아폴리스 심포니의 안탈 도라티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가 모두 부다페스트 태생이었다. 라이너의 시카고 사운드는 시카고 소방관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녹음들은 아직도 고전 중의 고전이다.


첫 거장들 뒤로도 마자르족의 미국 오케스트라 점령기는 계속 연장되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에는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왔고, 시카고 심포니는 게오르크 숄티를 맞았다. 숄티는 소방호스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알 카포네의 기관총 같은 무자비한 음악을 만든 지휘자이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시카고 심포니는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말러와 철의 장막 너머에서 구조신호를 보내던 소비에트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연주하기에 최적화된 강경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숄티의 베토벤은 성마르고 거침없던 작곡가 자신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다.


나는 게오르크 숄티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에서 내려온 지 6년째 되던 해인 1997년 여름을 기억한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비운에 세상을 떠난 지 닷새 뒤인 9월 5일에 시카고 심포니의 영원한 주인 숄티도 사망했다. 자신의 불꽃같던 음악과 달리 숄티는 자던 중에 평화롭고 고요하게 죽음을 맞았다.



성 패트릭의 날 녹색으로 물든 시카고 강물


숄티 뒤에 시카고에 온 다니엘 바렌보임은 헝가리와는 무관했지만, 더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그 또한 숄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고, 숄티가 나치와 싸웠던 것처럼 유대와 팔레스타인의 오랜 반목을 끝내고자 노력했다. 현 음악감독 리카르도 무티는 2010년에 부임했고, 전임자들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폴리 태생의 맹주이다. 앞서 유진 오먼디에 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무티였다.


이런 적지 않은, 하지만 얼핏 상관없을 법한 이미지와 정보들을 가지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장을 찾았다. 무티가 독감으로 아시아 투어에 오지 못하게 되어 로린 마젤이 대신한다는 뉴스가 여러 사람을 아쉽게 했다. 선전수전 겪은 마젤이 그만 못해서가 아니라 그는 4월에 뮌헨 필하모닉과 내한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동안 무티보다 우리나라를 더 자주 찾았던 지휘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젤로 교체된 것이 나에게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2006년 마젤은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번 프로그램이고, 당시에도 연주한 베토벤의 ‘에로이카’ 교향곡에 대한 내 실망스러운 리뷰가 아직도 생생했다.


“마젤의 ‘에로이카’는 지금껏 들어본 가장 지루한 연주였다. 첫 악장에서 영웅은 맥없이 상투적으로 등장했고, 두 번째 악장의 ‘장송 행진곡’은 끓어오르듯 비장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온 조문객 같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의 <에로이카 교향곡> 제2악장



옛 리뷰는 내가 봐도 너무 혹독했다. 해외 오케스트라들이 아시아 청중을 이른바 ‘봉’으로 알고,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비싼 값을 부르며 앞 다퉈 몰려들던 양상에서, 일면 무난했던 마젤의 해석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지난 7년 동안 라디오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생생한 콘서트 현장으로 청취자를 안내하면서 하나의 콘서트에 유일무이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해왔다. 똑같은 눈으로 본 이번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는 참 근사했다.


첫 곡은 주세페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서곡이었다. 베르디 중기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이지만, 이 서곡을 통해 나는 마피아의 고향에 도달한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을 사용한 <대부>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어느덧 두 번째 곡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다. 멘델스존이 그려낸 남국의 이미지는 찬란한 태양과 눈이 휘둥그레지는 유적을 꼼꼼하게 간추렸다. 마지막 악장의 살타렐로 춤곡과 더불어 나는 이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에 한껏 매료되었다.


마젤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난 지휘자였다. 그는 처음 보는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도 펼쳐드는 순간 음악이 눈앞에 좍 그려진다고 한다. 베토벤의 ‘에로이카’ 교향곡을 얼마나 많이 연주했겠는가! 2006년에도 2013년에도, 그의 베토벤을 들은 사람 가운데는 생애 몇 안 되는 감동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적잖이 실망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공연을 본 수준에 따라 각자의 감상이 다를진대 거기에 내 느낌 하나를 더해 보아야 절대적인 평이 될 수는 없다.


곡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앞서 열거한 이미지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좌충우돌하는 첫 악장의 악상은 다시 한 번 갱들의 다툼을 연상케 했다. 유장한 템포의 ‘장송 행진곡’에서는 소방관의 장례행렬, 나아가 숄티의 죽음을 떠올렸다. 영웅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불멸이 된다. 제3악장 스케르초에서는 어두운 시카고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쏜살같은 배트맨의 자동차를 본 듯했다. 마지막 악장에서 모두가 녹색인 성 패트릭 축일의 행렬에 참가하면서 마젤의 음악에 마음껏 동화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시카고를 만났다. 다음에 볼 콘서트는 나를 또 어느 도시로 안내할 것인가. 내가 가보았건 가보지 않았건, 음악으로 하는 여행은 언제나 제일 꼭대기의 즐거움을 준다. 벌써 맘이 조급한 사람은 오늘 저녁 8시, 내가 진행하는 <FM실황음악>을 들어보시라 권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생생한 콘서트 현장으로 떠나는 음악 여행...”



ⓒ 정준호. 2013.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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